농업생산력과 농업경영(김건태)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上)(한국사연구회 편, 지식산업사, 2008)
농업생산력과 농업경영(김건태)
머리말
-농촌현장에서 작성된 고문서를 적극 활용한 연구에 따르면 조선 후기 농업의 발전 방향은 자본주의 맹아론이 모델로 삼았던 16~17세기 유럽 농업의 발전 방향과 상당히 달랐음. 이 시기 농업의 발전 방향은 토지소유 및 경영의 영세화, 집약적 농법의 발달 등으로 같은 시기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와 유사함.
1. 과전법과 농장
-16세기는 ‘개간의 시대’. 전답의 소유자뿐만 아니라 경작자도 전답에 대한 권리 주장 가능. 16세까지만 해도 전답에 권리 주체가 1명 이상인 경우가 적지 않았음.
-농사지을 사람이 적고 땅은 많은 이 시기, 대토지 소유가 곧바로 많은 지대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음. 지배층과 지주는 수익극대화를 위해 토지제도와 신분제를 적극 활용함. 15세기의 그러한 토지제도가 과전법(科田法). 전국의 토지를 수조지로 설정한 다음 그 수조권을 정부의 각 기관과 전·현직 관료들에게 배분. 관료들에게 주어지는 토지(사전, 私田)는 경기도의 토지로 한정되어 등급에 따라 최고 150결, 최하 10결을 지급. 여기서 관료들은 생산량의 10분의 1을 수취했고, 수취한 곡물의 15분의 1을 지세로 국가에 납부. 과전법 체제에서 사전은 전주(田主), 토지의 실소유자는 전객(佃客)으로, 전주가 더 중요하게 여겨짐. 수조권 세습은 원칙적으로 허락되지 않았음(수신전, 휼양전은 예외).
-과전법은 초기부터 문제가 발생함. 우선 사전이 부족했고, 전주가 규정보다 더 많은 곡물을 요구하며 전주와 전객 사이 분쟁이 발생. 1466년 사전의 지급대상을 현직관료로 한정하는 직전법(職田法) 시행. 성종대에는 관에서 전조를 수취하여 전주에게 지급하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 채택. 관수관급제의 도입은 지배층이 농민들의 잉여생산물을 직접 수취하는 것을 금지하는 의미. 이로 인해 전조가 국가재정에 충당되는 공전(公田)의 지세처럼, 전조가 관인에게 지급되는 사전의 지세도 국가에서 직접 수취하였으며, 관수관급제는 16세기 점차 사라짐.
-지주들은 자신들의 소유토지를 효율적으로 경영하기 위해 노비제를 적극 활용, 작인들의 토지 방매를 방지하기 위해 노비와 토지를 결합시킴. 이를 농장(農庄)이라고 일컬음. 16세기에는 개간이 활발히 진행되고 노비가 급증하면서 농장이 확대. 지주들의 농장경영 형태는 작개(作介), 가작(家作), 병작(竝作). 작개와 가작은 노비제의 의존했으며, 노비의 신역(身役)이었던 작개경작이 주된 위치를 차지함. 지주는 노비에게 작개와 함께 사경(私耕)을 나누어줬는데, 비율은 비슷했으나 대체로 논 중심의 작개지가 밭 중심의 사경지보다 훨씬 우수했음. 작개지 수확물은 거의 전량을 지주가, 사경지 수확물은 노비가 차지함. 가작은 주로 거주지 근처 농장에서 이루어졌으며 모든 농사과정을 지주가 직접 관리하는 형태. 병작은 지주와 작인(作人) 사이에 맺어진 계약에 따라 운영되었으며 수확물은 똑같이 나누어 가졌음. 15세기 작인들은 지주에게 신분적으로 예속되지 않은 농민들이었기에 농장에 비해 부차적.
2. 농법의 집약화와 작물의 다각화
-15세기에는 전국의 농경지 중 전라·경상·충청·경기도의 논밭이 60퍼센트를 차지. 논농사지대 역시 경기도와 하삼도에 편중되어 있었음. 논은 전체 농경지에서 20퍼센트에 불과했으나, 논농사가 훨씬 중요하게 여겨짐.
-15세기 벼는 두 가지 방법으로 재배함. 물을 채운 논에 미리 발아시킨 볍씨를 파종하는 직파법(直播法), 못자리에서 자라고 있는 모를 뽑아 전체 논에 옮겨 심는 이앙법(移秧法). 15세기 농민 대부분은 직파법을 선택했으며, 이앙법은 16세기 지주들에 의해 도입되어 후반기에 경상도 북부 지역에서,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경기와 삼남지방에서 보편화. 이앙법의 장점은 김매기 노동력의 절감, 단점은 이앙기에 가뭄이 들면 실농. 직파법의 장점은 가뭄에 강하고, 단점은 김매기가 어렵다는 것. 이앙법은 직파법에 견주어 대략 6~7할 정도의 김매기 노동력을 절감시킬 수 있었고, 벼 재배가 끝난 가을부터 이듬해 초여름까지 논을 밭으로 전환할 수 있었음. 이러한 장점으로 이앙법은 점차 퍼져나감.
-이앙법의 일반화는 밭농사에 큰 영향을 미쳤음. 콩과 조 밭의 김매기 시기와 논의 김매기 시기가 서로 겹쳤던 직파법의 문제를 이앙법은 해결할 수 있었음. 또, 이앙법의 도입으로 그루갈이와 섞어짓기도 확산. 밭작물의 파종방법도 변화했는데, 농종법(壟種法)에서 이랑보다 낮은 고랑에 종자를 뿌리는 견종법(畎種法)이 확산됨. 면화, 담배 등의 상품작물 재배 또한 확산.
3. 타작과 도지의 확산
-개간은 17세기까지도 지속되어 17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개간 가능 지역을 찾기 어려워짐. 토지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땅에 대한 권리도 점차 분명해져, 작인의 권리가 17세기 들어 더욱 빠르게 소멸(일물일권적 소유권의 성립). 이로 인한 분쟁이 급증(‘토지소송의 시대’). 일물일권적 소유권의 성립으로 지주는 병작을 활용해도 지대를 원활히 수취할 수 있었음. 16세기 후반부터 노비들의 태업으로 농장 경영의 어려움이 급증. 지주들은 17세기부터 작개를 병작으로 빠르게 전환시켜 나감.
-조선 후기 지주제의 근간이 된 병작은 지대수취 방식에 따라 타작(打作), 도지(賭只), 집조(執租)로 구분. 가장 오래된 타작은 수확이 끝난 뒤 지주와 작인이 곡물을 반분(정률지대). 도지는 봄철에 수취할 곡물량을 결정하고 수확 후 수취하는 방식(정액지대)으로 통상 타작과 비슷한 수준을 수취. 17세기에 출현한 도지는 작개를 닮은 점이 많음. 첫째, 도지가 적용된 답은 작인이 수확물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전답과 짝하고 있었음. 둘째, 논의 도지액은 상당히 높았음. 셋째, 도지가 적용된 전답의 수취가 원활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음. 한편, 19세기에 발생한 도지는 수확이 임박한 시점에 작황 수준을 살펴본 다음 현장에서 지대량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도지와 타작의 중간형태.
4. 토지소유와 농업경영의 영세균등화
-토지와 달리 농촌인구는 18세기 들어서도 꾸준히 증가, 토지 증가율보다 농촌인구 증가율이 높았기 때문에 조선 후기 농민들의 평균 농지소유 규모와 대규모 토지 소유는 줄어듦(경자양안의 사례). 이는 인구 증가와 함께 토지의 분할상속이 지속되었기 때문. 양반지주들은 재산규모 영세화를 막기 위해 장자에게 토지를 집중하고 더 많은 전답을 제위전으로 할당하여 종손과 문중이 관리하게 함(‘종가형 지주’). 장자가 아닌 양반의 토지소유 규모는 더욱 영세화. 조선 후기 대토지 소유자는 고관을 역임한 관료적 지주였으나, 후손들이 관직 진출에 실패하고 분할상속에 따라 유지되지 못함.
-조선 후기에는 개별 농민의 경작면적 또한 차츰 축소. 지주들은 가능한 많은 작인들에게 땅을 빌려주어 안정성을 높이고자 함. 이에 하향평준화한 농민이 양산. 이는 농법의 변화추세와 함께 진행되었는데, 이앙법 보급 이후 농법이 점점 집약화되었으나 단위 농가의 노동력은 그 이전 수준에서 유지되고 경작면적이 차츰 축소되었던 것.
맺음말
-조선시대 농업생산력 변화는 16세기부터, 농업경영의 변화는 17세기 중반 이후부터라는 게 중론. 조선 후기 토지소유규모와 경영규모의 추이가 동시기 서유럽과 달리 영세균등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