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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세제도와 농민생활(송양섭)

이무민* 2024. 6. 19. 20:38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부세제도와 농민생활(송양섭)

 

머리말

-조선왕조의 부세제도는 전이 있으면 조()가 있고, 신이 있으면 역()이 있고, 호가 있으면 공물(貢物)이 있다고 하여 당의 조용조(租庸調) 제도를 이념형으로 하여 각기 토지·인신·호에 대응하는 형태로 이루어짐. 이는 국가기구 유지와 운영의 재정적 토대이며, ‘균부균세(均賦均稅)’의 이념에 의한 민과 토지지배의 구체적 표현. 민의 처지에서 본다면 조세와 부역은 생산활동과 별도로 삶을 규정하는 중대한 요소. 국가는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토지와 민을 공적 파악 대상으로 편입시키고자 한 반면, 민은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저항함.

 

전세제도의 변화

-과전법에서 수조율은 10분의 1, 15분의 1을 지세로 납부. 수조율은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에 의해 농작상황에 따라 차등을 두었으나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 1444년 세종대에 확정된 공법(貢法)은 문제를 개선하고 농업생산력의 발달에 걸맞는 전세수취를 도모함. 공법으로 수조율은 1/20로 하향조정되었으며, 전분6등제와 연분9등제로 수취율을 탄력적으로 조절. 하지만 16세기 이후 수조지분급제의 소멸, 사적지주제의 확대를 통한 재지사족의 성장으로 전세수취는 지주세력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편되어, 연분은 점차 하하년으로 고정되었고, 1635년 인조대 영정법(永定法)으로 결당 전세액은 4두로 법제화.

-양전(量田)을 통해 파악된 토지는 전세 징수의 근거. 전세 수치는 그 해의 작황과 시기전(時起田)을 조사하는 행심(行審), 면세결을 확정하는 표재(俵災), 납세자를 조직하는 작부(作夫)의 과정을 거침. 특히 작부제4결이나 8결 단위로 납세자를 조직하고 호수(戶首)가 조세납부를 책임지는 형태였는데, 관에 납부하는 액수와 실제 수취액의 차감분을 호수가 차지하는 양호방결(養戶防結)’로 많은 문제를 드러냄. 18세기 중엽 실시된 비총제(比摠制)는 호조에서 산출한 과세총수와 그해의 풍흉에 상당하는 연도의 실총을 비교하여 실총(實摠)과 재총(災摠)을 산출해 각도에 배분하면 감사가 각 읍에 분배하여 수취하는 형태. 전세감면권을 수령에게 넘기고 중앙정부는 해당년도의 수취총액만을 관철하여 전세수입의 안정적 확보를 도모함.

-다양한 명목의 부가세가 토지로 집중되는 경향이 점증. 훈련도감 재원조달을 위한 삼수미 부과, 대동법에 따른 공물의 토지세화, 균역법의 군포 감필분 보전을 위한 결전(結錢) . 19세기 무렵 토지에 부과되는 결당 전결세(田結稅)의 총액은 대략 조 100두 정도로 산정. 특히 군포·환곡 등의 감축·손결분까지 도결(都結)이라는 이름으로 부과되어 막대한 양에 이름. 1862년 농민항쟁에서 주요 이슈가 됨.

 

2. 공납제와 대동법

-공납제는 각 지역에 토산물을 할당, 현물로 수취하여 국가의 수요품을 조달하는 제도로 대체로 공물(貢物)과 진상(進上)으로 구성. 공물은 공안(貢案)에 수록된 정규적인 상공(常貢)과 수시로 거두는 별공(別貢)이 있었으며, 그 부과는 해당지역의 결수와 호구수가 참작되었지만 기준이 불분명하고 수취과정도 지방관과 향리에게 맡겨져 처음부터 문제가 존재. 한편 진상은 국왕과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예헌(禮獻)’의 방식으로 상납하는 것으로서 공물과 마찬가지로 군현단위로 배정되어 민호에 부과. 공물·진상은 그 자체의 부담 뿐 아니라 운반·수송에 소요되는 노동력도 요역의 형태로 제공해야 했으며, 토산물을 배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구조적 모순이 있었음. 이는 공물의 대리납부, 방납(防納)을 가져와 소농민의 몰락을 초래하여 공납제 개혁문제를 중대현안으로 부각시킴. 지방에서는 공물가격을 미곡의 형태로 수취하여 방납으로 내는 관행이 확산되어 이를 사대동(私大同)이라 하는데, 대동법은 이러한 사대동의 관행을 국가적 차원에서 공인한 것.

-대동법의 선구적 형태는 임진왜란 중 유성룡의 건의로 일시 채택된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광해군 즉위 직후 경기지역에서 처음 실시된 대동법은 충청·전라·경상도로 확대되어 1708년 숙종대 전국적 시행. 함경·강원·황해도에는 상정법(詳定法), 평안도에는 수미법(收米法)이 채택되었으나 본질적으로 대동법과 다르지 않음. 대동법의 전국적 시행이 1세기가 소요된 데에는 지주층과 방납인들의 반대가 격렬했으며, 양전의 미비로 토지파악이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 대동법은 가호 단위로 부과하던 부담의 대부분을 토지세로 편입시킨 것으로 국가재정의 궁핍과 농민의 몰락에 직면하여 채택된 개혁.

-대동미는 대략 결당 12 정도로, (()으로 대납하기도 함. 선혜청은 각처에서 대동미를 거두어 공인(貢人)에게 지급하여 국가의 수요품을 조달. 대동법의 시행은 공물·진상의 상당부분을 지세화, 각종 역역(力役)의 물납화·금납화 촉진, 국가재정도 어느 정도 안정화. 방납인에서 합법적 지위를 획득한 공인층은 대상인으로 성장하여 상업과 수공업 발전에도 영향. 대동미는 처음에는 유치미(留置米) 명목으로 지방관아의 경비로 일정량이 비축되고 나머지는 중앙으로 상납되었으나, 18세기 이후 중앙재정 수요 증가로 상납미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지방재정의 곤란을 초래.

 

3. 군역과 요역

-조선왕조는 국가가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신역제(身役制)를 바탕으로 징발하였는데 대부분이 군역과 요역. 군역은 병농일치의 이념 아래 호적대장을 토대로 파악된 16~60세의 남정에게 부과, 이념적으로는 천인을 제외한 모든 계층을 대상으로 양인개병(良人皆兵)의 원칙(양반은 군역에서 제외). 군역부과의 단위는 직접 군영을 담당할 정군(正軍), 이를 재정적으로 보조하는 봉족(奉足)으로 이루어졌으며, 군호(軍戶)는 여러 변화를 거침. 16세기 이후 값을 지불하고 다른 사람을 대신 세우는 대립(代立), 실제 복무를 하지 않고 포를 거두는 방군수포(放軍收布)가 확산되며 군역은 광범위하게 납포군(納布軍)으로 변모.

-17세기 군역은 양인개병 원칙이 허구화하고 양인만이 부담하는 양역(良役)으로 변모, 신분제에 입각한 특권적 부세화. 특히 양란 이후 대규모 군영이 속속 창설되고 군액이 폭증하면서 군역제 운영의 심각한 모순(백골징포, 황구첨정 등의 폐단)이 드러나며 농민층은 여러 가지 피역(避役)으로 대응. 17세기 후반부터 양역변통론이 활발히 제기되었으나 논란 끝에 감필론이 채택, 1751년 영조대 균역법(均役法)의 실시로 군역부담을 1필로 감필균일화(減疋均一化). 그러나 100만 필에 달하던 군역수입이 50만 필 정도로 줄어든 상황에서 대체재원이 강구되어야 했고, 이른바 급대(給代)’ 명목으로 어염선세(漁鹽船稅), 은여결(隱餘結), 이획(移劃),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결전(結錢) 등이 색출됨. 이들 재원이 균역청에 귀속되면서 수입의 상당부분을 의존하고 있던 지방관청은 만성적인 재정난을 겪음.

-18세기 중엽 양역실총(良役實摠)의 간행으로 상당부분의 군역이 정액화. 그러나 재정난에 시달리던 지방관청은 각종 잡다한 역종(사모속, 私募屬)을 만들어 재원을 충당하고자 함. 전국적인 군역자원의 부족(군다민소, 軍多民少) 현상이 일어나면서 양반사족층도 공동납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 1871년 고종대 호포법도 이 관행을 법인화한 것.

-요역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정기·부정기적으로 징발·사역하는 제도로 경작토지 규모를 기준으로 하는 계전제(計田制)를 쓰다가 16세기 이후 신역제의 전반적인 물납화 추세 속에서 같은 과정을 밟았음. 국가의 각종 토목공사에 동원되는 노동력은 값을 지불하고 고용하는 모립제(募立制) 확산, 대동법으로 공물과 진상과 관련 요역의 상당부분은 지세화, 군현단위의 각종 요역도 잡역세 명목으로 물납화.

 

4. 환곡제도

-환곡제는 과거의 제도를 계승하여 국가 차원에서 곡물을 비축하여 대여함으로써 농민의 재생산기반을 돕기 위한 제도. 또한 국가의 갑작스러운 재정수요에 응하고 재해나 흉년에 대비한 예비재정으로서 정부는 비축곡을 확보하고자 노력. 하지만 환곡의 농민진휼이라는 성격은 점차 변질. 본래 대출 곡물의 10퍼센트를 이자로 거둬들이도록 규정했으나, 점차 국가재정에 편입되고 재정보용을 목적으로 30퍼센트까지 거둘 수 있게 변화함.

-18세기 들어 환곡은 각 기관의 재정 확보를 위한 사실상 부세의 한 부문으로 변질. 특히 균역법으로 지방재정의 상당수가 중앙으로 이속되면서 환곡을 통한 수입이 지방관청의 새로운 재원으로 떠오름. 18세기 초 약 500만 석이던 환곡총수는 18세기 말~19세기 초 약 1000만 석까지 상승, 90~100퍼센트까지 치솟은 회록율(會錄率), 진분(盡分)의 일상화, 강제로 맡기는 늑대(勒貸), 이자만을 수취하는 와환(臥還) 등 여러 폐단. 19세기 들어 이러한 양상은 더욱 격화되고 지방관의 횡포나 향리들의 농간이 겹치며 문제는 심화. 1862년 농민항쟁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이 환곡의 폐단.

 

5. 조세부담과 농민생활

-15세기 무렵 조선은 사실상 휴한농법의 극복과 연작상경의 단계, 강력한 공권력을 바탕으로 국가수조지와 공민의 확보에 주력하여 국가운영의 물적토대를 삼고자 함. 15세기 과전법체제 하 조세와 국역부담의 기축은 양인자영농민. 이들은 국가의 수취체제에 얽매여 생활기반을 크게 제약당함. 전세수취를 위한 답험이나 수세과정에서 편파적 부담을 감수. 군역은 세조대 보법시행으로 군역부담층이 대폭 확대되는 과정에서 농민층의 유리유망을 가속화하고, 16세기 이후 양반사족층이 군역으로부터 이탈하자 상황은 더욱 악화. 공납은 모호하고 복잡한 수취기준의 문제와 수령과 방납배의 결탁으로 자의적 수탈이 일상화. 대다수 농민은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형편이었으며, 수취체제의 모순과 중압은 농민을 파산시키고 토지로부터 이탈시킴. 16세기 이후 사적지주제의 광범위한 전개를 배경으로 지주가의 전호나 노비로 대거 전락.

-양란 이후 늘어난 각급기관의 할거적 재정지배는 정규재정부문에서 벗어난 면세지면역자 양산, 국가경제의 커다란 부담을 낳음. 대동법과 균역법은 농민생활의 상대적 안정과 국가재정 건실성 제고에 일정하게 기여. 여기에 급격히 변질된 환곡을 더해 18세기 조선의 부세제도는 전정군정환곡 중심의 삼정체제로 운영. 이 시기 실시된 비총제는 지방재정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지방관청은 비공식 부문의 수취를 늘리는 형태로 대응. 이 과정에서 지방수령은 집중된 부세수취권으로 자체재정 확보에 열을 올렸고, 촌락민은 자구책을 강구하여 면리단위의 공동납 등으로 대응함.

-전정의 경우 전세대동삼수미결작 등에 더해 중앙과 지방 관청이 창출해 낸 각종 부가세가 조 100두를 상회. 군정은 각종 사모속과 집단적인 피역으로 타지역의 부담을 떠안는 상황. 갖가지 환곡은 농민의 생활기반을 뒤흔듦. 지방재정의 구조적 취약성에서 비롯된 부세운영상의 모순은 19세기 부세운영의 총체적 난맥상을 불러옴. 정약용에 따르면, 1결의 토지를 경작하는 8인가족의 연수입 600두에서 지주에게 지대로 납부하고 남은 300두 가운데 종자, , 식량 등을 제하면 실제 남는 것은 100두에 지나지 않고, 과중한 부세는 단순재생산조차 곤란한 농민들의 생활을 파산으로 몰아가곤 했음.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점진적 소득증대와 지위향상에도 불구하고 부세의 중압은 농민의 삶을 곤경에 빠뜨렸으며, 19세기 농민항쟁으로 이어짐.

 

맺음말

-첫째, 계급간 대립이나 국가의 수탈과 모순, 이에 대한 반발이라는 측면에서 벗어나야. 계급적 이해나 수탈만으로 해명하기 어려운 공적 구조와 운영의 원리 존재. 둘째, 부세제도의 촌락사회 관철과 민의 삶에 대한 규정력에 대한 연구. 셋째, 재정사에 대한 전향적 관심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