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 판서 이이(李珥)가 졸하였다. 이이는 병조 판서로 있을 때부터 과로로 인하여 병이 생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악화되었으므로 상이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하였다. 이때 서익(徐益)이 순무 어사(巡撫御史)로 관북(關北)에 가게 되었는데, 상이 이이에게 찾아가 변방에 관한 일을 묻게 하였다. 자제들은 병이 현재 조금 차도가 있으나 몸을 수고롭게 해서는 안 되니 접응하지 말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이이는 말하기를,

 

"나의 이 몸은 다만 나라를 위할 뿐이다. 설령 이 일로 인하여 병이 더 심해져도 이 역시 운명이다."

 

하고, 억지로 일어나 맞이하여 입으로 육조(六條)의 방략(方略)을 불러주었는데, 이를 다 받아 쓰자 호흡이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하더니 하루를 넘기고 졸하였다. 향년 49세였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너무도 놀라서 소리를 내어 슬피 통곡하였으며 3일 동안 소선(素膳)을 들었고 위문하는 은전을 더 후하게 내렸다. 백관의 요우(僚友)와 관학(館學)의 제생(諸生), 위졸(衛卒시민(市民), 그 밖의 서관(庶官이서(吏胥복례(僕隸)들까지도 모두 달려와 모여 통곡했으며, 궁벽한 마을의 일반 백성들도 더러는 서로 위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백성들이 복이 없기도 하다.’ 하였다. 발인하는 날 밤에는 멀고 가까운 곳에서 집결하여 전송하였는데, 횃불이 하늘을 밝히며 수십 리에 끊이지 않았다. 이이는 서울에 집이 없었으며 집안에는 남은 곡식이 없었다. 친우들이 수의(襚衣)와 부의(賻儀)를 거두어 염하여 장례를 치룬 뒤 조그마한 집을 사서 가족에게 주었으나 그래도 가족들은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서자(庶子) 두 사람이 있었다. 부인 노씨(盧氏)는 임진 왜란 때에 죽었는데 그 문에 정표(旌表)하게 했다.

 

이이의 자는 숙헌(叔獻)이고 호는 율곡(栗谷)이다. 나면서부터 신이(神異)하였고 확연히 큰 뜻이 있었다. 총명하여 지혜가 숙성해 7세에 이미 경서(經書)를 통달하고 글을 잘 지었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12세 때 아버지가 병들자 팔을 찔러 피를 내어 드렸고 조상의 사당에 나아가 울면서 기도하였는데 아버지의 병이 즉시 나았다. 학문을 하면서 문장 공부에 힘쓰지 않았어도 일찍부터 글을 잘 지어 사방에 이름이 알려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비탄에 잠긴 나머지 잘못 선학(禪學)에 물이 들어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도(佛道)를 닦았는데, 승려들 간에 생불(生佛)이 출현했다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잘못된 행동임을 깨닫고 돌아와 정학(正學)에 전념하였는데, 스승의 지도를 받지 않고서도 도의 큰 근본을 환하게 알고서 정미하게 분석하여 철저한 신념으로 힘써 실행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후에는 청현직(淸顯職)을 여러 번 사양하였으며, 그 도를 작게 쓰고자 아니하여 해주(海州)의 산중으로 물러가 살면서 강학(講學)하며 후학을 교육시켰다. 이에 은병 정사(隱屛精舍)를 세워 주자(朱子)를 사사(祠祀)하며 정암(靜菴퇴계(退溪)를 배향(配享)하여 본보기로 삼았는데, 나아가고 물러남과 사양하고 받아들이는 일을 한결 같이 옛 사람이 하던 대로 하는 것을 스스로의 규범으로 삼았다.

 

어려서부터 장공예(張公藝)가 구세 동거(九世同居)한 것을 사모하여 항상 그림을 걸어놓고 완미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맏형수에게 신주(神主)를 받들어 함께 살기를 청하여 모시고 아우와 자질(子姪)을 모아 의식(衣食)을 함께 하면서 세시(歲時)와 초하루 보름에는 이른 아침에 찾아 배알하는 등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대로 하였다.

 

아래로 비복(婢僕)에 이르기까지 참알(參謁)하고 출입하는 데 모두 예식이 있었는데 별도로 훈사(訓辭)를 만들어 한글로 번역해서 가르쳤으며 규문(閨門)이 마치 관부와 같았다. 한 당()에 모여 식사를 하고, 연주하고 노래하며 놀 때에도 모두 예절이 있었다. 당세에 예의를 강구하여 초상 때와 제사 때에 정성을 다한다고 이름난 사람이라도 가정 교육의 예절에 있어서는 모두 따를 수가 없었다. 매양 아버지를 일찍 여읜 것을 슬퍼하여 중형(仲兄)을 아버지 섬기듯이 하여 성심과 성의를 다하고 게을리함이 없었다. 그리고 서모(庶母)를 친어머니 섬기듯이 하여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보살폈으며 저녁과 아침마다 정성으로 문안드렸다. 또 녹봉도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았는데, 학자들이 그것은 예()가 아니라고 하자, 이이는 말하기를,

 

"내 의견이 그러할 뿐인데, 본보기가 될 수는 없다."

 

하였다.

 

조정에 나아가서는 위를 섬김에 있어 갈충 진력하였으며 시골에 물러나 있을 때에도 애타는 심정으로 잊지 못하였다. 전후에 걸쳐 올린 봉장(封章)과 면대하여 아뢴 말들을 보면 그 내용이 간절하고도 강직한데, 치체(治體)를 논함에 있어 규모가 높고 원대하여 삼대(三代)의 정치를 회복하는 것으로 목표를 삼았다.

 

나라 형세가 쇠퇴해져 난리의 조짐이 있음을 분명히 알고는 항상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조정을 화합하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고, 폐정을 고치고 생민을 구제하고 무비(武備)를 닦는 것으로 급무를 삼았다. 그리고 이를 반복해서 시종 일관 한 뜻으로 논계하였는데, 소인이나 속류의 배척을 당했어도 조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임금도 처음에는 견제를 가하였으나 늦게나마 다시 뜻이 일치되어 은총과 신임이 바야흐로 두터워지고 있는 때에 갑자기 졸한 것이다.

 

이이는 타고난 기품이 매우 고상한데다가 수양을 잘하여 더욱 높은 경지에 나아갔는데, 청명한 기운에 온화한 분위기가 배어나오고 활달하면서도 과감하였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상황이든 한결같이 정성되고 신실하게 대하였으며, 은총과 사랑을 받거나 오해나 미움을 받거나 털끝만큼도 개의치 않았으므로 어리석거나 지혜있는 자를 막론하고 마음으로 그에게 귀의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 시대를 구제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기 때문에 물러났다가 다시 조정에 진출해서도 사류(士類)를 보합(保合)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아 사심없이 할 말을 다하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꺼리는 대상이 되었는데, 마침내 당인(黨人)에게 원수처럼 되어 거의 큰 화를 면치 못할 뻔하였다. 이이는 인물을 논하고 추천할 때 반드시 학문과 명망과 품행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진실되지 못하면서 빌붙으려는 자들은 나중에 많이 배반하였다. 그래서 세속의 여론은 그를 너무도 현실에 어둡다고 지목하였다.

 

그러나 이이가 졸한 뒤에 편당이 크게 기세를 부려 한쪽을 제거시키고는 조정을 바로잡았다고들 하였는데, 그 내부에서 다시 알력이 생겨 사분오열이 되어 마침내 나라의 무궁한 화근이 되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때에 이르러서는 강토가 무너지고 나라가 마침내 기울어지는 결과를 빚고 말았는데, 이이가 평소에 미리 염려하여 먼저 말했던 것이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건의했던 각종 편의책(便宜策)들이 다시 추후에 채택되었는데, 국론과 민언(民言)이 모두 이이는 도덕과 충의의 정신으로 꽉 차 있어 흠잡을 수 없다.’고 칭송하였다.

 

저서로 문집과 성학집요(聖學輯要)·격몽요결(擊蒙要訣)·소학집주(小學集注)개정본이 세상에 전해 온다.

 

선조수정실록 18, 선조 1711일 기묘 1번째기사 1584년 명 만력(萬曆)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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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부세제도와 농민생활(송양섭)

 

머리말

-조선왕조의 부세제도는 전이 있으면 조()가 있고, 신이 있으면 역()이 있고, 호가 있으면 공물(貢物)이 있다고 하여 당의 조용조(租庸調) 제도를 이념형으로 하여 각기 토지·인신·호에 대응하는 형태로 이루어짐. 이는 국가기구 유지와 운영의 재정적 토대이며, ‘균부균세(均賦均稅)’의 이념에 의한 민과 토지지배의 구체적 표현. 민의 처지에서 본다면 조세와 부역은 생산활동과 별도로 삶을 규정하는 중대한 요소. 국가는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토지와 민을 공적 파악 대상으로 편입시키고자 한 반면, 민은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저항함.

 

전세제도의 변화

-과전법에서 수조율은 10분의 1, 15분의 1을 지세로 납부. 수조율은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에 의해 농작상황에 따라 차등을 두었으나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 1444년 세종대에 확정된 공법(貢法)은 문제를 개선하고 농업생산력의 발달에 걸맞는 전세수취를 도모함. 공법으로 수조율은 1/20로 하향조정되었으며, 전분6등제와 연분9등제로 수취율을 탄력적으로 조절. 하지만 16세기 이후 수조지분급제의 소멸, 사적지주제의 확대를 통한 재지사족의 성장으로 전세수취는 지주세력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편되어, 연분은 점차 하하년으로 고정되었고, 1635년 인조대 영정법(永定法)으로 결당 전세액은 4두로 법제화.

-양전(量田)을 통해 파악된 토지는 전세 징수의 근거. 전세 수치는 그 해의 작황과 시기전(時起田)을 조사하는 행심(行審), 면세결을 확정하는 표재(俵災), 납세자를 조직하는 작부(作夫)의 과정을 거침. 특히 작부제4결이나 8결 단위로 납세자를 조직하고 호수(戶首)가 조세납부를 책임지는 형태였는데, 관에 납부하는 액수와 실제 수취액의 차감분을 호수가 차지하는 양호방결(養戶防結)’로 많은 문제를 드러냄. 18세기 중엽 실시된 비총제(比摠制)는 호조에서 산출한 과세총수와 그해의 풍흉에 상당하는 연도의 실총을 비교하여 실총(實摠)과 재총(災摠)을 산출해 각도에 배분하면 감사가 각 읍에 분배하여 수취하는 형태. 전세감면권을 수령에게 넘기고 중앙정부는 해당년도의 수취총액만을 관철하여 전세수입의 안정적 확보를 도모함.

-다양한 명목의 부가세가 토지로 집중되는 경향이 점증. 훈련도감 재원조달을 위한 삼수미 부과, 대동법에 따른 공물의 토지세화, 균역법의 군포 감필분 보전을 위한 결전(結錢) . 19세기 무렵 토지에 부과되는 결당 전결세(田結稅)의 총액은 대략 조 100두 정도로 산정. 특히 군포·환곡 등의 감축·손결분까지 도결(都結)이라는 이름으로 부과되어 막대한 양에 이름. 1862년 농민항쟁에서 주요 이슈가 됨.

 

2. 공납제와 대동법

-공납제는 각 지역에 토산물을 할당, 현물로 수취하여 국가의 수요품을 조달하는 제도로 대체로 공물(貢物)과 진상(進上)으로 구성. 공물은 공안(貢案)에 수록된 정규적인 상공(常貢)과 수시로 거두는 별공(別貢)이 있었으며, 그 부과는 해당지역의 결수와 호구수가 참작되었지만 기준이 불분명하고 수취과정도 지방관과 향리에게 맡겨져 처음부터 문제가 존재. 한편 진상은 국왕과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예헌(禮獻)’의 방식으로 상납하는 것으로서 공물과 마찬가지로 군현단위로 배정되어 민호에 부과. 공물·진상은 그 자체의 부담 뿐 아니라 운반·수송에 소요되는 노동력도 요역의 형태로 제공해야 했으며, 토산물을 배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구조적 모순이 있었음. 이는 공물의 대리납부, 방납(防納)을 가져와 소농민의 몰락을 초래하여 공납제 개혁문제를 중대현안으로 부각시킴. 지방에서는 공물가격을 미곡의 형태로 수취하여 방납으로 내는 관행이 확산되어 이를 사대동(私大同)이라 하는데, 대동법은 이러한 사대동의 관행을 국가적 차원에서 공인한 것.

-대동법의 선구적 형태는 임진왜란 중 유성룡의 건의로 일시 채택된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광해군 즉위 직후 경기지역에서 처음 실시된 대동법은 충청·전라·경상도로 확대되어 1708년 숙종대 전국적 시행. 함경·강원·황해도에는 상정법(詳定法), 평안도에는 수미법(收米法)이 채택되었으나 본질적으로 대동법과 다르지 않음. 대동법의 전국적 시행이 1세기가 소요된 데에는 지주층과 방납인들의 반대가 격렬했으며, 양전의 미비로 토지파악이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 대동법은 가호 단위로 부과하던 부담의 대부분을 토지세로 편입시킨 것으로 국가재정의 궁핍과 농민의 몰락에 직면하여 채택된 개혁.

-대동미는 대략 결당 12 정도로, (()으로 대납하기도 함. 선혜청은 각처에서 대동미를 거두어 공인(貢人)에게 지급하여 국가의 수요품을 조달. 대동법의 시행은 공물·진상의 상당부분을 지세화, 각종 역역(力役)의 물납화·금납화 촉진, 국가재정도 어느 정도 안정화. 방납인에서 합법적 지위를 획득한 공인층은 대상인으로 성장하여 상업과 수공업 발전에도 영향. 대동미는 처음에는 유치미(留置米) 명목으로 지방관아의 경비로 일정량이 비축되고 나머지는 중앙으로 상납되었으나, 18세기 이후 중앙재정 수요 증가로 상납미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지방재정의 곤란을 초래.

 

3. 군역과 요역

-조선왕조는 국가가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신역제(身役制)를 바탕으로 징발하였는데 대부분이 군역과 요역. 군역은 병농일치의 이념 아래 호적대장을 토대로 파악된 16~60세의 남정에게 부과, 이념적으로는 천인을 제외한 모든 계층을 대상으로 양인개병(良人皆兵)의 원칙(양반은 군역에서 제외). 군역부과의 단위는 직접 군영을 담당할 정군(正軍), 이를 재정적으로 보조하는 봉족(奉足)으로 이루어졌으며, 군호(軍戶)는 여러 변화를 거침. 16세기 이후 값을 지불하고 다른 사람을 대신 세우는 대립(代立), 실제 복무를 하지 않고 포를 거두는 방군수포(放軍收布)가 확산되며 군역은 광범위하게 납포군(納布軍)으로 변모.

-17세기 군역은 양인개병 원칙이 허구화하고 양인만이 부담하는 양역(良役)으로 변모, 신분제에 입각한 특권적 부세화. 특히 양란 이후 대규모 군영이 속속 창설되고 군액이 폭증하면서 군역제 운영의 심각한 모순(백골징포, 황구첨정 등의 폐단)이 드러나며 농민층은 여러 가지 피역(避役)으로 대응. 17세기 후반부터 양역변통론이 활발히 제기되었으나 논란 끝에 감필론이 채택, 1751년 영조대 균역법(均役法)의 실시로 군역부담을 1필로 감필균일화(減疋均一化). 그러나 100만 필에 달하던 군역수입이 50만 필 정도로 줄어든 상황에서 대체재원이 강구되어야 했고, 이른바 급대(給代)’ 명목으로 어염선세(漁鹽船稅), 은여결(隱餘結), 이획(移劃),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결전(結錢) 등이 색출됨. 이들 재원이 균역청에 귀속되면서 수입의 상당부분을 의존하고 있던 지방관청은 만성적인 재정난을 겪음.

-18세기 중엽 양역실총(良役實摠)의 간행으로 상당부분의 군역이 정액화. 그러나 재정난에 시달리던 지방관청은 각종 잡다한 역종(사모속, 私募屬)을 만들어 재원을 충당하고자 함. 전국적인 군역자원의 부족(군다민소, 軍多民少) 현상이 일어나면서 양반사족층도 공동납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 1871년 고종대 호포법도 이 관행을 법인화한 것.

-요역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정기·부정기적으로 징발·사역하는 제도로 경작토지 규모를 기준으로 하는 계전제(計田制)를 쓰다가 16세기 이후 신역제의 전반적인 물납화 추세 속에서 같은 과정을 밟았음. 국가의 각종 토목공사에 동원되는 노동력은 값을 지불하고 고용하는 모립제(募立制) 확산, 대동법으로 공물과 진상과 관련 요역의 상당부분은 지세화, 군현단위의 각종 요역도 잡역세 명목으로 물납화.

 

4. 환곡제도

-환곡제는 과거의 제도를 계승하여 국가 차원에서 곡물을 비축하여 대여함으로써 농민의 재생산기반을 돕기 위한 제도. 또한 국가의 갑작스러운 재정수요에 응하고 재해나 흉년에 대비한 예비재정으로서 정부는 비축곡을 확보하고자 노력. 하지만 환곡의 농민진휼이라는 성격은 점차 변질. 본래 대출 곡물의 10퍼센트를 이자로 거둬들이도록 규정했으나, 점차 국가재정에 편입되고 재정보용을 목적으로 30퍼센트까지 거둘 수 있게 변화함.

-18세기 들어 환곡은 각 기관의 재정 확보를 위한 사실상 부세의 한 부문으로 변질. 특히 균역법으로 지방재정의 상당수가 중앙으로 이속되면서 환곡을 통한 수입이 지방관청의 새로운 재원으로 떠오름. 18세기 초 약 500만 석이던 환곡총수는 18세기 말~19세기 초 약 1000만 석까지 상승, 90~100퍼센트까지 치솟은 회록율(會錄率), 진분(盡分)의 일상화, 강제로 맡기는 늑대(勒貸), 이자만을 수취하는 와환(臥還) 등 여러 폐단. 19세기 들어 이러한 양상은 더욱 격화되고 지방관의 횡포나 향리들의 농간이 겹치며 문제는 심화. 1862년 농민항쟁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이 환곡의 폐단.

 

5. 조세부담과 농민생활

-15세기 무렵 조선은 사실상 휴한농법의 극복과 연작상경의 단계, 강력한 공권력을 바탕으로 국가수조지와 공민의 확보에 주력하여 국가운영의 물적토대를 삼고자 함. 15세기 과전법체제 하 조세와 국역부담의 기축은 양인자영농민. 이들은 국가의 수취체제에 얽매여 생활기반을 크게 제약당함. 전세수취를 위한 답험이나 수세과정에서 편파적 부담을 감수. 군역은 세조대 보법시행으로 군역부담층이 대폭 확대되는 과정에서 농민층의 유리유망을 가속화하고, 16세기 이후 양반사족층이 군역으로부터 이탈하자 상황은 더욱 악화. 공납은 모호하고 복잡한 수취기준의 문제와 수령과 방납배의 결탁으로 자의적 수탈이 일상화. 대다수 농민은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형편이었으며, 수취체제의 모순과 중압은 농민을 파산시키고 토지로부터 이탈시킴. 16세기 이후 사적지주제의 광범위한 전개를 배경으로 지주가의 전호나 노비로 대거 전락.

-양란 이후 늘어난 각급기관의 할거적 재정지배는 정규재정부문에서 벗어난 면세지면역자 양산, 국가경제의 커다란 부담을 낳음. 대동법과 균역법은 농민생활의 상대적 안정과 국가재정 건실성 제고에 일정하게 기여. 여기에 급격히 변질된 환곡을 더해 18세기 조선의 부세제도는 전정군정환곡 중심의 삼정체제로 운영. 이 시기 실시된 비총제는 지방재정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지방관청은 비공식 부문의 수취를 늘리는 형태로 대응. 이 과정에서 지방수령은 집중된 부세수취권으로 자체재정 확보에 열을 올렸고, 촌락민은 자구책을 강구하여 면리단위의 공동납 등으로 대응함.

-전정의 경우 전세대동삼수미결작 등에 더해 중앙과 지방 관청이 창출해 낸 각종 부가세가 조 100두를 상회. 군정은 각종 사모속과 집단적인 피역으로 타지역의 부담을 떠안는 상황. 갖가지 환곡은 농민의 생활기반을 뒤흔듦. 지방재정의 구조적 취약성에서 비롯된 부세운영상의 모순은 19세기 부세운영의 총체적 난맥상을 불러옴. 정약용에 따르면, 1결의 토지를 경작하는 8인가족의 연수입 600두에서 지주에게 지대로 납부하고 남은 300두 가운데 종자, , 식량 등을 제하면 실제 남는 것은 100두에 지나지 않고, 과중한 부세는 단순재생산조차 곤란한 농민들의 생활을 파산으로 몰아가곤 했음.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점진적 소득증대와 지위향상에도 불구하고 부세의 중압은 농민의 삶을 곤경에 빠뜨렸으며, 19세기 농민항쟁으로 이어짐.

 

맺음말

-첫째, 계급간 대립이나 국가의 수탈과 모순, 이에 대한 반발이라는 측면에서 벗어나야. 계급적 이해나 수탈만으로 해명하기 어려운 공적 구조와 운영의 원리 존재. 둘째, 부세제도의 촌락사회 관철과 민의 삶에 대한 규정력에 대한 연구. 셋째, 재정사에 대한 전향적 관심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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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국사 길잡이()(한국사연구회 편, 지식산업사, 2008)

 

농업생산력과 농업경영(김건태)

 

머리말

-농촌현장에서 작성된 고문서를 적극 활용한 연구에 따르면 조선 후기 농업의 발전 방향은 자본주의 맹아론이 모델로 삼았던 16~17세기 유럽 농업의 발전 방향과 상당히 달랐음. 이 시기 농업의 발전 방향은 토지소유 및 경영의 영세화, 집약적 농법의 발달 등으로 같은 시기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와 유사함.

 

1. 과전법과 농장

-16세기는 개간의 시대’. 전답의 소유자뿐만 아니라 경작자도 전답에 대한 권리 주장 가능. 16세까지만 해도 전답에 권리 주체가 1명 이상인 경우가 적지 않았음.

-농사지을 사람이 적고 땅은 많은 이 시기, 대토지 소유가 곧바로 많은 지대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음. 지배층과 지주는 수익극대화를 위해 토지제도와 신분제를 적극 활용함. 15세기의 그러한 토지제도가 과전법(科田法). 전국의 토지를 수조지로 설정한 다음 그 수조권을 정부의 각 기관과 전·현직 관료들에게 배분. 관료들에게 주어지는 토지(사전, 私田)는 경기도의 토지로 한정되어 등급에 따라 최고 150, 최하 10결을 지급. 여기서 관료들은 생산량의 10분의 1을 수취했고, 수취한 곡물의 15분의 1을 지세로 국가에 납부. 과전법 체제에서 사전은 전주(田主), 토지의 실소유자는 전객(佃客)으로, 전주가 더 중요하게 여겨짐. 수조권 세습은 원칙적으로 허락되지 않았음(수신전, 휼양전은 예외).

-과전법은 초기부터 문제가 발생함. 우선 사전이 부족했고, 전주가 규정보다 더 많은 곡물을 요구하며 전주와 전객 사이 분쟁이 발생. 1466년 사전의 지급대상을 현직관료로 한정하는 직전법(職田法) 시행. 성종대에는 관에서 전조를 수취하여 전주에게 지급하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 채택. 관수관급제의 도입은 지배층이 농민들의 잉여생산물을 직접 수취하는 것을 금지하는 의미. 이로 인해 전조가 국가재정에 충당되는 공전(公田)의 지세처럼, 전조가 관인에게 지급되는 사전의 지세도 국가에서 직접 수취하였으며, 관수관급제는 16세기 점차 사라짐.

-지주들은 자신들의 소유토지를 효율적으로 경영하기 위해 노비제를 적극 활용, 작인들의 토지 방매를 방지하기 위해 노비와 토지를 결합시킴. 이를 농장(農庄)이라고 일컬음. 16세기에는 개간이 활발히 진행되고 노비가 급증하면서 농장이 확대. 지주들의 농장경영 형태는 작개(作介), 가작(家作), 병작(竝作). 작개와 가작은 노비제의 의존했으며, 노비의 신역(身役)이었던 작개경작이 주된 위치를 차지함. 지주는 노비에게 작개와 함께 사경(私耕)을 나누어줬는데, 비율은 비슷했으나 대체로 논 중심의 작개지가 밭 중심의 사경지보다 훨씬 우수했음. 작개지 수확물은 거의 전량을 지주가, 사경지 수확물은 노비가 차지함. 가작은 주로 거주지 근처 농장에서 이루어졌으며 모든 농사과정을 지주가 직접 관리하는 형태. 병작은 지주와 작인(作人) 사이에 맺어진 계약에 따라 운영되었으며 수확물은 똑같이 나누어 가졌음. 15세기 작인들은 지주에게 신분적으로 예속되지 않은 농민들이었기에 농장에 비해 부차적.

 

2. 농법의 집약화와 작물의 다각화

-15세기에는 전국의 농경지 중 전라·경상·충청·경기도의 논밭이 60퍼센트를 차지. 논농사지대 역시 경기도와 하삼도에 편중되어 있었음. 논은 전체 농경지에서 20퍼센트에 불과했으나, 논농사가 훨씬 중요하게 여겨짐.

-15세기 벼는 두 가지 방법으로 재배함. 물을 채운 논에 미리 발아시킨 볍씨를 파종하는 직파법(直播法), 못자리에서 자라고 있는 모를 뽑아 전체 논에 옮겨 심는 이앙법(移秧法). 15세기 농민 대부분은 직파법을 선택했으며, 이앙법은 16세기 지주들에 의해 도입되어 후반기에 경상도 북부 지역에서,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경기와 삼남지방에서 보편화. 이앙법의 장점은 김매기 노동력의 절감, 단점은 이앙기에 가뭄이 들면 실농. 직파법의 장점은 가뭄에 강하고, 단점은 김매기가 어렵다는 것. 이앙법은 직파법에 견주어 대략 6~7할 정도의 김매기 노동력을 절감시킬 수 있었고, 벼 재배가 끝난 가을부터 이듬해 초여름까지 논을 밭으로 전환할 수 있었음. 이러한 장점으로 이앙법은 점차 퍼져나감.

-이앙법의 일반화는 밭농사에 큰 영향을 미쳤음. 콩과 조 밭의 김매기 시기와 논의 김매기 시기가 서로 겹쳤던 직파법의 문제를 이앙법은 해결할 수 있었음. , 이앙법의 도입으로 그루갈이와 섞어짓기도 확산. 밭작물의 파종방법도 변화했는데, 농종법(壟種法)에서 이랑보다 낮은 고랑에 종자를 뿌리는 견종법(畎種法)이 확산됨. 면화, 담배 등의 상품작물 재배 또한 확산.

 

3. 타작과 도지의 확산

-개간은 17세기까지도 지속되어 17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개간 가능 지역을 찾기 어려워짐. 토지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땅에 대한 권리도 점차 분명해져, 작인의 권리가 17세기 들어 더욱 빠르게 소멸(일물일권적 소유권의 성립). 이로 인한 분쟁이 급증(‘토지소송의 시대’). 일물일권적 소유권의 성립으로 지주는 병작을 활용해도 지대를 원활히 수취할 수 있었음. 16세기 후반부터 노비들의 태업으로 농장 경영의 어려움이 급증. 지주들은 17세기부터 작개를 병작으로 빠르게 전환시켜 나감.

-조선 후기 지주제의 근간이 된 병작은 지대수취 방식에 따라 타작(打作), 도지(賭只), 집조(執租)로 구분. 가장 오래된 타작은 수확이 끝난 뒤 지주와 작인이 곡물을 반분(정률지대). 도지는 봄철에 수취할 곡물량을 결정하고 수확 후 수취하는 방식(정액지대)으로 통상 타작과 비슷한 수준을 수취. 17세기에 출현한 도지는 작개를 닮은 점이 많음. 첫째, 도지가 적용된 답은 작인이 수확물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전답과 짝하고 있었음. 둘째, 논의 도지액은 상당히 높았음. 셋째, 도지가 적용된 전답의 수취가 원활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음. 한편, 19세기에 발생한 도지는 수확이 임박한 시점에 작황 수준을 살펴본 다음 현장에서 지대량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도지와 타작의 중간형태.

 

4. 토지소유와 농업경영의 영세균등화

-토지와 달리 농촌인구는 18세기 들어서도 꾸준히 증가, 토지 증가율보다 농촌인구 증가율이 높았기 때문에 조선 후기 농민들의 평균 농지소유 규모와 대규모 토지 소유는 줄어듦(경자양안의 사례). 이는 인구 증가와 함께 토지의 분할상속이 지속되었기 때문. 양반지주들은 재산규모 영세화를 막기 위해 장자에게 토지를 집중하고 더 많은 전답을 제위전으로 할당하여 종손과 문중이 관리하게 함(‘종가형 지주’). 장자가 아닌 양반의 토지소유 규모는 더욱 영세화. 조선 후기 대토지 소유자는 고관을 역임한 관료적 지주였으나, 후손들이 관직 진출에 실패하고 분할상속에 따라 유지되지 못함.

-조선 후기에는 개별 농민의 경작면적 또한 차츰 축소. 지주들은 가능한 많은 작인들에게 땅을 빌려주어 안정성을 높이고자 함. 이에 하향평준화한 농민이 양산. 이는 농법의 변화추세와 함께 진행되었는데, 이앙법 보급 이후 농법이 점점 집약화되었으나 단위 농가의 노동력은 그 이전 수준에서 유지되고 경작면적이 차츰 축소되었던 것.

 

맺음말

-조선시대 농업생산력 변화는 16세기부터, 농업경영의 변화는 17세기 중반 이후부터라는 게 중론. 조선 후기 토지소유규모와 경영규모의 추이가 동시기 서유럽과 달리 영세균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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