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 판서 이이(李珥)가 졸하였다. 이이는 병조 판서로 있을 때부터 과로로 인하여 병이 생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악화되었으므로 상이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하였다. 이때 서익(徐益)이 순무 어사(巡撫御史)로 관북(關北)에 가게 되었는데, 상이 이이에게 찾아가 변방에 관한 일을 묻게 하였다. 자제들은 병이 현재 조금 차도가 있으나 몸을 수고롭게 해서는 안 되니 접응하지 말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이이는 말하기를,
"나의 이 몸은 다만 나라를 위할 뿐이다. 설령 이 일로 인하여 병이 더 심해져도 이 역시 운명이다."
하고, 억지로 일어나 맞이하여 입으로 육조(六條)의 방략(方略)을 불러주었는데, 이를 다 받아 쓰자 호흡이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하더니 하루를 넘기고 졸하였다. 향년 49세였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너무도 놀라서 소리를 내어 슬피 통곡하였으며 3일 동안 소선(素膳)을 들었고 위문하는 은전을 더 후하게 내렸다. 백관의 요우(僚友)와 관학(館學)의 제생(諸生), 위졸(衛卒)·시민(市民), 그 밖의 서관(庶官)·이서(吏胥)·복례(僕隸)들까지도 모두 달려와 모여 통곡했으며, 궁벽한 마을의 일반 백성들도 더러는 서로 위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백성들이 복이 없기도 하다.’ 하였다. 발인하는 날 밤에는 멀고 가까운 곳에서 집결하여 전송하였는데, 횃불이 하늘을 밝히며 수십 리에 끊이지 않았다. 이이는 서울에 집이 없었으며 집안에는 남은 곡식이 없었다. 친우들이 수의(襚衣)와 부의(賻儀)를 거두어 염하여 장례를 치룬 뒤 조그마한 집을 사서 가족에게 주었으나 그래도 가족들은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서자(庶子) 두 사람이 있었다. 【부인 노씨(盧氏)는 임진 왜란 때에 죽었는데 그 문에 정표(旌表)하게 했다.】
이이의 자는 숙헌(叔獻)이고 호는 율곡(栗谷)이다. 나면서부터 신이(神異)하였고 확연히 큰 뜻이 있었다. 총명하여 지혜가 숙성해 7세에 이미 경서(經書)를 통달하고 글을 잘 지었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12세 때 아버지가 병들자 팔을 찔러 피를 내어 드렸고 조상의 사당에 나아가 울면서 기도하였는데 아버지의 병이 즉시 나았다. 학문을 하면서 문장 공부에 힘쓰지 않았어도 일찍부터 글을 잘 지어 사방에 이름이 알려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비탄에 잠긴 나머지 잘못 선학(禪學)에 물이 들어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도(佛道)를 닦았는데, 승려들 간에 생불(生佛)이 출현했다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잘못된 행동임을 깨닫고 돌아와 정학(正學)에 전념하였는데, 스승의 지도를 받지 않고서도 도의 큰 근본을 환하게 알고서 정미하게 분석하여 철저한 신념으로 힘써 실행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후에는 청현직(淸顯職)을 여러 번 사양하였으며, 그 도를 작게 쓰고자 아니하여 해주(海州)의 산중으로 물러가 살면서 강학(講學)하며 후학을 교육시켰다. 이에 은병 정사(隱屛精舍)를 세워 주자(朱子)를 사사(祠祀)하며 정암(靜菴)·퇴계(退溪)를 배향(配享)하여 본보기로 삼았는데, 나아가고 물러남과 사양하고 받아들이는 일을 한결 같이 옛 사람이 하던 대로 하는 것을 스스로의 규범으로 삼았다.
어려서부터 장공예(張公藝)가 구세 동거(九世同居)한 것을 사모하여 항상 그림을 걸어놓고 완미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맏형수에게 신주(神主)를 받들어 함께 살기를 청하여 모시고 아우와 자질(子姪)을 모아 의식(衣食)을 함께 하면서 세시(歲時)와 초하루 보름에는 이른 아침에 찾아 배알하는 등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대로 하였다.
아래로 비복(婢僕)에 이르기까지 참알(參謁)하고 출입하는 데 모두 예식이 있었는데 별도로 훈사(訓辭)를 만들어 한글로 번역해서 가르쳤으며 규문(閨門)이 마치 관부와 같았다. 한 당(堂)에 모여 식사를 하고, 연주하고 노래하며 놀 때에도 모두 예절이 있었다. 당세에 예의를 강구하여 초상 때와 제사 때에 정성을 다한다고 이름난 사람이라도 가정 교육의 예절에 있어서는 모두 따를 수가 없었다. 매양 아버지를 일찍 여읜 것을 슬퍼하여 중형(仲兄)을 아버지 섬기듯이 하여 성심과 성의를 다하고 게을리함이 없었다. 그리고 서모(庶母)를 친어머니 섬기듯이 하여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보살폈으며 저녁과 아침마다 정성으로 문안드렸다. 또 녹봉도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았는데, 학자들이 그것은 예(禮)가 아니라고 하자, 이이는 말하기를,
"내 의견이 그러할 뿐인데, 본보기가 될 수는 없다."
하였다.
조정에 나아가서는 위를 섬김에 있어 갈충 진력하였으며 시골에 물러나 있을 때에도 애타는 심정으로 잊지 못하였다. 전후에 걸쳐 올린 봉장(封章)과 면대하여 아뢴 말들을 보면 그 내용이 간절하고도 강직한데, 치체(治體)를 논함에 있어 규모가 높고 원대하여 삼대(三代)의 정치를 회복하는 것으로 목표를 삼았다.
나라 형세가 쇠퇴해져 난리의 조짐이 있음을 분명히 알고는 항상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조정을 화합하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고, 폐정을 고치고 생민을 구제하고 무비(武備)를 닦는 것으로 급무를 삼았다. 그리고 이를 반복해서 시종 일관 한 뜻으로 논계하였는데, 소인이나 속류의 배척을 당했어도 조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임금도 처음에는 견제를 가하였으나 늦게나마 다시 뜻이 일치되어 은총과 신임이 바야흐로 두터워지고 있는 때에 갑자기 졸한 것이다.
이이는 타고난 기품이 매우 고상한데다가 수양을 잘하여 더욱 높은 경지에 나아갔는데, 청명한 기운에 온화한 분위기가 배어나오고 활달하면서도 과감하였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상황이든 한결같이 정성되고 신실하게 대하였으며, 은총과 사랑을 받거나 오해나 미움을 받거나 털끝만큼도 개의치 않았으므로 어리석거나 지혜있는 자를 막론하고 마음으로 그에게 귀의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 시대를 구제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기 때문에 물러났다가 다시 조정에 진출해서도 사류(士類)를 보합(保合)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아 사심없이 할 말을 다하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꺼리는 대상이 되었는데, 마침내 당인(黨人)에게 원수처럼 되어 거의 큰 화를 면치 못할 뻔하였다. 이이는 인물을 논하고 추천할 때 반드시 학문과 명망과 품행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진실되지 못하면서 빌붙으려는 자들은 나중에 많이 배반하였다. 그래서 세속의 여론은 그를 너무도 현실에 어둡다고 지목하였다.
그러나 이이가 졸한 뒤에 편당이 크게 기세를 부려 한쪽을 제거시키고는 조정을 바로잡았다고들 하였는데, 그 내부에서 다시 알력이 생겨 사분오열이 되어 마침내 나라의 무궁한 화근이 되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때에 이르러서는 강토가 무너지고 나라가 마침내 기울어지는 결과를 빚고 말았는데, 이이가 평소에 미리 염려하여 먼저 말했던 것이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건의했던 각종 편의책(便宜策)들이 다시 추후에 채택되었는데, 국론과 민언(民言)이 모두 ‘이이는 도덕과 충의의 정신으로 꽉 차 있어 흠잡을 수 없다.’고 칭송하였다.
저서로 문집과 《성학집요(聖學輯要)》·《격몽요결(擊蒙要訣)》·《소학집주(小學集注)》 개정본이 세상에 전해 온다.
선조수정실록 18권, 선조 17년 1월 1일 기묘 1번째기사 1584년 명 만력(萬曆) 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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