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근대철학(서양근대철학회, 창비, 2001)

1부 근대철학의 형성

 

1: 사회변동과 인간의 재발견(김용환·윤선구·이태하)

 

작성완료: 18.05.24

 

1. 르네상스

 

-르네상스는 철학사에서 과도기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우나, 근대철학의 발생 배경과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르네상스 시대의 일반적 특징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말은 재생, 부활을 의미한다.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로마의 문헌과 미술을 토대로 한 고전 문화의 부활을, 이차적으로는 중세의 가톨릭적 세계관과 인간관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자연적 인간성의 부흥을 의미한다. 르네상스의 생성이 중세의 연속인지 단절인지를 두고 논쟁이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중세문화에 내재하였으나 그간 대립을 이루던 요인들이 특정한 시공간적 환경을 만나 발전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북유럽 르네상스로 나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대개 페트라르카가 고대 로마의 문헌을 발굴하기 시작한 1336년부터 티치아노가 사망한 1576년까지로 보며, 북유럽 르네상스 및 종교개혁, 과학혁명보다 거의 2세기 가까이 앞서 직·간접적 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는 북유럽과 달리 봉건제가 덜 발달하여 도시문화와 자본주의 경제가 일찍부터 발전함에 따라 시민계급의 정치·사회적 해방을 가능케 했다. , 지속적인 교황과 황제의 권력다툼 속에서 14세기 이탈리아의 각 도시국가는 교회로부터 비교적 독립적인 시민·상인계층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였다. 이는 밀라노의 비스꼰띠(Visconti), 피렌쩨의 메디치(Medici) 가문과 같은 인문주의자들의 충실한 후견자를 낳는다.

 

-초기 르네상스(1300년대)는 주로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인문주의자(Humanist)는 본래 인문학의 교사란 뜻으로, 그 교육사상의 핵심은 모든 교육은 고전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고전주의였다.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살루타티, 브루니 등의 인문주의자들은 주로 시인 또는 문필가들로, 로마 사상가들의 문헌을 연구하고 흩어진 고대 문헌을 발굴하고 도서관을 건립하여 고전에 대한 접근성을 높였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스콜라철학에 융합되어 중세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나, 인문주의의 움직임은 스콜라철학의 영향에 물들지 않은 진정한 고대 철학의 연구에 영향을 미쳐 플라톤주의의 부활로 이어졌다. 1440년 피렌체에 플라톤 아카데미가 설립되어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았으며, 마르씰리오 피치노는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누스의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고대 철학에 대한 이런 관심은 궁극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판과 함께 스콜라철학의 몰락을 가져왔다.

 

-르네상스는 무엇보다 예술 분야에서 빛났다. 1423년 마자치오가 회화에 새로운 기법을 도입했으며, 1434년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완성하면서 본격적인 예술 분야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다. 르네상스는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과 같은 천재적인 예술가들을 배출했다. 이 밖에도 르네상스는 학문·의학·기술·법률·상업제도 등 모든 생활영역에 파급되어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북유럽 르네상스는 뒤늦게 시작되어 곧바로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에라스무스, 몽테뉴,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등은 모두 이탈리아에서 수학하였으나 독자적 사상을 전개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상가들 중 철학적으로 중요한 인물로는 군주론의 저자인 마키아벨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르네상스에서 근대 철학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중세 스콜라철학의 전통과 교회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 근본적으로 비철학적이었던 인문주의자들의 활동이었다.

 

-미슐레는 르네상스를 교회의 권위와 이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스콜라철학에 반대한 점을 강조하며, 자유주의적 특징에 주목한다. 그러나 르네상스가 가톨릭 교회에 적대적이진 않았으며, 스콜라철학의 권위를 고대 철학으로 대체한 것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있다. 한편, 부르크하르트는 인문주의자들의 특징을 자연주의 경향에서 찾는다. 여기서 자연주의는 자연과학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개개의 사물과 현실에 대한 관심을 의미하며, 그는 인간과 세계의 발견을 르네상스의 본질적 특징으로 지적한다. 르네상스는 중세의 유명론과 고딕의 자연주의를 계승하여 근대의 개인주의와 과학혁명을 가능케 한 바탕을 마련하였으며, 통일적인 역동적 체계로서의 자연을 탐구한 브루노, 파라첼주스 등의 활동은 관심의 대상을 자연으로 옮겨 과학혁명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

 

-, 르네상스는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분명 중세에 속하나, 자연과 개체 또는 개인 대한 관심을 높이고 교회 및 스콜라철학의 권위로부터 어느 정도 사상의 자유를 확보함으로써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을 가능케 했고 근대철학이 싹틀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였다.

 

2. 종교개혁

 

-종교개혁은 16세기 루터(M. Luther)가 면죄부 판매에 대항하여 비텐베르크 성에 내붙인 95개조의 반박문에 의해 촉발되어 칼뱅(J. Calvin)에 의해 교리적으로 체계화되었다. 루터는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위를 강조하며, 오직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른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구원관 회복을 주장했다. 이는 칼뱅의 구원예정설로 이어지는데, 이에 따르면 구원받을 자는 신의 은총을 통해 미리 정해져 있으므로 인간의 자의적인 노력으로 변경할 수 없다.

 

-루터의 이신칭의론과 칼뱅의 구원예정설은 인간의 의지가 자유로우며 의지를 실천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자유의지론과 정면으로 상충한다. 이들은 인간의 의지는 무력한 것이며(‘짐바리 짐승’, “신이 이 짐승 위에 타면 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고 사탄이 타면 사탄이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 진정한 기독교인의 자유란 자신의 의지가 무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사제들의 죄에 대한 사면권을 부인하는 동시에 그 근거인 중세교회의 연옥설을 부정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가톨릭 교회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교혁명의 결과로 교회는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며, 신에게 예배하기에 알맞은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교육기관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종교개혁은 기독교인은 어디서 종교적 권위를 찾아야 하는가라는 교리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해 로마교회라는 역사적 제도 신의 의지가 직접 계시된 성경 인간의 이성 개인의 양심이라는 답을 생각해볼 수 있다. 기존 가톨릭에서는 신의 뜻은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교회를 통해 전달되며, 신의 자연적 계시는 신이 준 은사의 하나인 인간 이성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신의 뜻은 성경을 통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으며, 심지어 불신론자들도 그들의 양심 안에 신의 말씀이 각인되어 있다고 보았다.

 

-교회의 권위를 부인한다는 점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주의자들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이성을 신뢰한 인문주의자들과 달리 반지성주의 성향을 보였으며, 이성을 철저히 배격하는 신앙주의(fideism)의 토대 위에서 초대 교회의 영성을 회복하려는 일종의 신앙회복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의 저항정신은 근대 시민사회운동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가톨릭 교회로 하여금 자성의 계기를 갖게 하였다. 한편, 이들의 반지성주의적 태도는 과학의 발목을 잡고 있던 교회의 귄위를 약화시켜 의도치 않게 근대 자연과학의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개혁주의자들이 수용한 오컴의 주의주의는 점차 신앙의 문제를 이성의 논의로부터 배제함으로써 이성의 영역에 속하는 자연과학, 신앙의 영역에 속하는 신학이 독립적으로 형성되게 하였다.

 

-종교개혁은 근대철학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난해한 신학 논쟁에 염증을 느낀 철학자들은 17세기 이후 과학으로 관심사를 이동했다. 오직 인간 이성에만 호소하는 철학은 수학이나 역학처럼 명확한 지식을 추구하는 하나의 과학이 되고자 했다.

 

3. 시민사회의 성립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 함께 사회·정치적 변동, 시민사회(civil society)의 성립은 근대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시민사회 또는 넓은 의미의 근대성(modernity)의 사회·문화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생산체계의 규모가 커졌으며 산업화와 기계화가 진행되었다(산업혁명). 둘째, 자기이익의 추구를 존재의 목적으로 하며 합리적·계산적인 개인들로 근대 사회가 구성되어 갔다. 셋째, 인간의 노동력이 상품으로 인식되며 시장에서의 교환이 가능해졌다. 넷째, 개인은 시민권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국가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는 자유를 확대할 수 있었다. 다섯째, 진리·아름다움·도덕 등 문화적 가치영역이 다양해졌다. 이러한 특징들은 17세기 이후 시민사회의 성숙과정에서 더욱 분명해지며 현대사회까지 지속된다. 관련한 몇 가지 사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로마의 흔적 지우기

 

-유럽에서 로마제국은 비록 멸망했지만 정치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등장(962), 종교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 언어적으로 라틴어를 통해 계승되었다. 따라서 근대로의 이행을 위해서 로마제국의 흔적을 지울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신성로마제국은 독일·프랑스·이탈리아로 분열되어 결국 독일에만 그 영향력이 제한되었다. , 종교개혁은 크게 보면 로마의 흔적을 지우려는 유럽인들의 영적 저항운동이었다. 라틴어를 버리고 자국어를 공식어로 사영하기 시작한 것은 정신적 독립의 상징이었다. 세르반테스(M. de Cervantes), 셰익스피어(W. Shakespeare), 단테(A. Dante)가 각기 자국어로 문화 활동을 한 것은 물론, 종교개혁 후 루터의 첫 번째 사업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상업혁명과 민족국가의 성립

 

-중세 유럽사회는 성직자, 봉건귀족, 시민, 농민 등 네 종류의 계급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 시민(bourgeois)은 귀족과 농민의 중간계급으로 소규모 상공업자들이었다. 중세 유럽에서 봉건제의 붕괴 원인 중 시민계급의 등장도 꼽을 수 있다. 페스트의 만연으로 초래된 노동력의 감소는 유럽경제를 농업 중심에서 상업이라는 새로운 경제 형태로 자연스럽게 이행하도록 만들었다.

 

-중세의 상업 중심지는 주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로, 그 중심세력은 아라비아 상인들과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의 상인들이었다. 지중해를 끼고 있는 도시국가들 사이에는 무역업이 번창하였으며 이 직업에 종사한 시민들의 세력이 확장되었다. 곧이어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무역업에 합류하면서 새로운 항로개척의 필요성이 절실해졌고, 이 과정에서 아메리카의 발견, 동인도회사의 설립, 아프리카 희망봉의 발견 등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대서양시대가 개막되었으며, 도시국가 중심의 상업이 민족국가 중심의 상업으로 전환되었다. 상업혁명은 중세 유럽인들의 눈을 세계로 돌리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유럽인들의 식민지 개척은 유럽의 언어와 문화, 관습과 제도를 전 세계에 확산시켰으며,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편, 근대 철학은 모두 민족국가라는 정치환경 안에서 성장한 이론들이다. 민족국가의 성립을 가능하게 만든 배경은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자국어를 사용하여 학문을 하는 지식인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언어를 기반으로 한 민족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둘째, 자국 상인을 보호할 필요성이 커지면서 군사력을 갖춘 민족국가의 수립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셋째, 절대군주제의 등장으로 토지를 소유한 귀족계급의 영향력이 감소되고 시민계급이 절대군주의 정치적 파트너로 부상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회계약론이 등장할 수 있었다.

 

자연법 이론의 재등장과 시민계급을 위한 철학

 

-자연법은 이성의 명령이자 신의 명령이며 도덕률이다. 키케로 같은 로마의 법률가들과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신학자들에 의해 계승된 자연법 사상은 근대에 재등장한다. 자연법의 정신은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며 자유로운 존재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개인의 의무를 강조하던 고대·중세의 도덕률 대신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는 근대의 도덕률이, 신분과 지위의 관념에서 계약의 관념으로의 전환이 나타났다.

 

-중세철학이 성직자·라틴어·직업철학자들의 철학이라면, 근대 철학은 평신도·자국어·비직업적 철학자들의 철학이다. 근대 철학자들의 대부분은 시민계급 출신으로, 이로서 과거의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독창성과 창조적 정신이 더 중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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