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
고려·조선시대에 양인(良人)으로서 전주(田主)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대토지소유자에게 의지해 조(租)를 전주에게 바친 일종의 소작농. 전객(佃客)·장객(莊客)이라고도 했다. 중국에서는 한(漢)나라 이래 지주의 토지를 얻어 경작하고 소작료를 지불하던 소작농으로 서양 중세의 농노(農奴)와 비슷한 신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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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주전호제

- 조선시대 토지 소유주인 지주와 이를 소작하는 전호가 연결되어 나타나는 토지소유형태.
조선시대 토지는 소유권을 중심으로 국가 소유는 공전(公田), 개인 소유는 민전(民田)이라 하였다. 또한 궁방전(宮房田)과 같이 왕실에서 소유하고 있는 토지도 있다. 민전의 경우 직접 농업 생산활동에 참여하는 농민들이 소유한 토지도 있지만, 자신은 토지만 소유할 뿐 직접 농사짓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전자는 자작농이지만 후자는 지주로서 자신 소유의 토지를 소작인에게 대여해 주고 소출되는 생산량에 따라 분배하였다.
이와 같이 토지 소유주인 지주와 이를 임대받아 경작하는 전호(田戶)가 있는 형식의 토지 소유 형태를 지주전호제라 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16세기 이후 토지 소유권이 강화됨에 따라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갔으며, 18세기 이후에는 사회 저변의 다양한 변화와 함께 지주와 전호의 객체도 변화되었다.
일반적으로 18세기 이전의 지주는 양반 관료층이 대다수를 차지하였고, 이들은 자신의 토지를 노비를 통해 경작하거나 혹은 소작을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소작을 줄 경우에는 수확량의 절반을 받아 가는 병작반수제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소요되는 경비를 경작자가 댄다는 면에서 볼 때 지주에게 유리한 형태로 운영되었다.
18세기 이후에는 이앙법의 보급과 각종 시비의 발달, 벼 품종의 개발 등 농업 기술력의 발달로 농업생산량이 증가되었고, 이로 인해 농민층이 분해되었다. 또한 상공업의 발달로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상업에 종사하면서 부를 축적하는 세력이 증가하게 되었다. 나아가 도망 노비의 증가로부터 나타난 신분 와해 현상은 사회분화를 촉진하면서 지주계층과 전호계층의 구성비를 변화시켰다. 즉 과거 지주가 양반 관료층이 중심을 이루었다면 이제는 일반 농민이나 상인들도 지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고, 부민(富民)들의 등장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을 양산하면서 이들이 임금노동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기주
조선시대 이미 경작되고 있는 토지[기경전 起耕田]의 전주. 이에 반해 경작되고 있지 않은 토지인 진전(陳田)의 전주를 ‘진주(陳主)’라 하였다.
조선시대의 모든 토지는 그 사방 경계 표시인 사표(四標)와 함께 전주명이 양안(量案)에 등록되는데, 그 토지가 기경전이면 “起主 ○○○” 또는 “起 ○○○” 등으로, 진전이면 “陳主 ○○○”로 전주를 표기하였다.
이때 양반 전주이면 그 신분을 명시하는 직함이나 품계를 표시하고 본인의 성명을 밝힌 뒤 가노의 이름을 첨가해 기록하였다. 평민 전주이면 직역(職役)과 성명을 기재하고, 천민 전주이면 그 성은 생략하고 천역의 명칭과 이름만을 기입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전주, 즉 기주·진주의 표기원칙이 엄격히 지켜지지는 않았다. 또, 양반들은 자기의 이름이 양안의 기주·진주로 기재되는 것을 싫어해, 소유 노비의 이름으로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동일한 지역의 군현 양안에 기재된 기주의 수가 호적상의 호수보다 배 이상 많은 것이 상례였다. 이 같은 현상은 대체로 등재된 기주 중에 다른 지역의 호적에 올라 있는 사람이 다수 있었다는 점, 누호자(漏戶者)·누정자(漏丁者)·누적자(漏籍者) 등으로 인해 호적의 호수가 실제보다 적었다는 점, 하나의 호적 안에 있는 다른 가족이 양안 상으로는 기주로 등재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 등에서 연유하는 것이었다.
또한, 군현 양안은 일차적으로 토지의 면적에 기준을 둔 소유 관계를 중점적으로 기재하고 그 병작 관계는 거의 기록하지 않기 때문에, 양안에 나오는 기주가 농업경영면에서 지주인가 자작농인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개인 양안의 경우에는 기주가 시작인(時作人 : 倂作人)으로 기록되기도 하고, 또 시작인이 기주로 기록된 경우도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기주 중에는 자기소유 토지와 남의 토지를 함께 경작하는 이른바 자소작농(自小作農)이 다수 있었다고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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