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철학
2장 세계를 변화시키자: ‘프락시스’에서 ‘생산’으로
작성완료: 18.07.27
-이 장의 목적은 마르크스가 이후 포어이바흐에 관한 열한 번째 테제 1의 정식화가 제기한 질문들의 지평을 넘어서지 못했음에도, 왜 그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테제들’은 마르크스가 1845년 3월 경 집필한 것으로, 출판을 위한 것이 아닌 ‘메모’[비망록]이다. 그 직전 마르크스는《1844년 원고》를 통해 임노동제라는 형태 내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노동의 소외에 관한 현상학적 분석을 수행한다. 여기서 인간이 자기 자신의 노동과 자연, 즉 사적 소유가 제거했던 ‘공동체적 본질’과 화해하는 것으로 사고된, 공산주의에 대한 인간주의적․자연주의적 개념화가 나타난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1844년 원고》집필을 중단하고, 엥겔스와 함께 ‘청년 헤겔주의’ 철학의 서로 다른 조류들과의 논쟁을 목적으로 하는《독일 이데올로기》 집필에 착수한다. ‘테제들’의 집필은 이 시기와 일치한다.
-알튀세르는 이 ‘테제들’을 절단의 ‘앞면’으로 제시한다 2. ‘테제들’의 핵심은 ‘새로운 유물론’ 또는 실천의 유물론 내에서 철학의 ‘두 진영’, 즉 관념론(헤겔)과, 모든 지적 추상들 감성, 다시 말해 생명, 감각, 정서로 환원하는 이전의 유물론 또는 ‘직관적 유물론’(포이어바흐) 사이의 전통적 대립을 지양하는 것이다.
-소외 비판.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소외’, 즉 현실의 감성적 인간들이 자신들의 구원과 완성을 초감각적인 또 다른 세계에서 표상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고자 했다. 이 착시 현상을 의식함으로써 인간들은 신에 의해 소외되었던 자신들의 본질을 ‘재영유’하고, 진정한 형제애를 창조해낼 수 있게 된다. 포이어바흐 이후, (마르크스를 포함한) 비판적 철학자들은 동일한 도식을 인간 존재의 추상화와 ‘박탈/탈소유’에 관한 또 다른 현상들, 특히 인간들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이상적 공동체로서의 정치적 영역을 구성하는 현상으로까지 확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테제들’에서 이런 투사의 진정한 이유는 의식의 허상이 아닌, 사회를 지배하는 분열 또는 분할, 즉 개인들을 서로 대립하게 만드는 실천적 갈등이라고 주장한다. 인간들은 특정한 인간들이 다른 특정한 인간들에 의존하는 사태를 제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실천적 변형 그 자체를 통해서만 이런 소외에서 탈출할 수 있다. 즉, 소외를 중단할 수 있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혁명이다. ‘테제들’은 철학의 가장 드높은 야심, 즉 해방과 자유화의 실현을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서 철학에서의 확정적 탈출을 요구하는 것이다.
철학에 반하는 혁명
-정확히 이 지점에서 여러 가지 난점들이 출현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언표는 상당히 역설적이다. 한편으로 이 언표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바를 즉시 수행하며, 철학을 향해 회귀하는 것을 금지한다(“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측면으로, ‘말하는 것이 하는 것’이고 ‘하는 것은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말하는 단어들은 절대로 순수하지 않다. 이 테제에서 말하듯 세계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 반면 혁명적 실천은 하나 또는 일의적인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은 전혀 순수하지 않다 3. 이 테제가 제시하는 변형의 일의성이 동시에 철학의 내적 갈등들에 대한 ‘해결’을 표상하기도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가 발견한,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탈출’ 행위인 이런 명령이 철학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런 정식은 다른 철학적 언표들과 함께 이론과 실천, 의식과 삶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를 공통적으로 겨냥한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철학의 중심뿐만 아니라 이 철학의 가장 사변적인 운동의 중심에 자리 잡아, 자기 고유의 한계들을 사고하려 노력한다.
-마르크스의 사유가 지니는 심원한 다의성을 기억하며 ‘테제들’에 함축된 두 가지 질문, ① ‘실천’(또는 프락시스)과 ‘계급투쟁’ 사이의 관계라는 질문 ② 인간학 또는 ‘인간의 본질’이라는 질문을 분석해보자.
프락시스와 계급투쟁
-‘테제들’은 혁명에 관해 말하면서도 ‘계급투쟁’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지만, 결국 그것을 함축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혁명은 프랑스 대혁명의 ‘좌익적 측면’, 즉 평등주의적 구성 부분에서 영감과 에너지를 되찾음으로써 유럽적 차원에서 이 혁명적 운동을 완수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혁명적 운동이 사변적 개념화가 아니라 사회적 운동 4에 관한 것임을 강조한다. 여기에 중간지대는 존재하지 않으며, 혁명을 완수하고 비가역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혁명을 심화하고 이를 통해 이 혁명을 사회혁명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이 사회혁명의 담지자들은 프롤레타리아(‘인민 중의 인민’)이다. 비판적 지식인들이 수단을 여전히 모색하고 있던 때에, 프롤레타리아는 이미 행위의 차원으로 넘어가 사실상 혁명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 시기 모든 텍스트들에서 마르크스는 이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시민사회의 현행적 해체를 표상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통해 마르크스가 의도하는 것은 ① 프롤레타리아의 존재 조건들이 이런 사회의 모든 원칙들과 모순된다는 점 ② 프롤레타리아는 사적 소유, 이윤, 애국주의, 부르주아 개인주의와는 다른 가치들에 따라 살아간다는 점 ③ 프롤레타리아가 국가 그리고 지배계급과 대립하게 된다는 것이 근대 사회구조의 필연적인, 하지만 이 사회구조에는 가까운 시일 내에 죽음을 가져올 효과 그 자체라는 점이다. -현재의 행위. ‘현행적’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첫 번째 측면은 마르크스의 반 유토피아적 지향성을 표현하며,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최초 형태들에 대한 준거에 왜 마르크스가 주목했는지 보여준다. ‘테제들’이 말하는 혁명적 실천은 사회의 재구성을 위한 하나의 프로그램 또는 하나의 계획을 실현해서는 안 되며, 철학적․사회학적 이론들이 제시하는 미래의 비전에 덜 의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혁명적 실천은 “현재의 상태를 폐지하는 현실의 운동”과 일치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의 유일한 유물론적 정의라고 마르크스가 설명한 것이다.
-두 번째 측면. ‘현행적’이라는 것은 현재에서 전개되는 활동과 기획과 관련되기에, 행위는 현재에 이루어져야 하며 이 행위에 대해 논평하거나 예고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철학은 자신의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혁명적 요청과 운동에 조응하는 것은 ‘행위의 철학’ 5도 아니며, 단적으로 말해 바로 행위 그 자체이다.
-여기서 철학은 자리를 양보하는 대신 스스로의 중요성을 유지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바로 이런 명령 내에서 자기 자신의 실현을 보려고 한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프랑스 대혁명이 생산한 관념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독일 관념론 전통, 즉 칸트(“자신의 의무를 행하라”)와 헤겔(“존재해야 하는 것은 또한 현행적이다. 또한 존재함 없이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어떤 진리도 갖지 못한다.”)을 생각하고 있다. 근대 철학은 보편적인 것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의 원칙들과 동일시했지만, 이 원칙들은 매순간 부르주아 시민사회에 의해 무시되거나 금지된다. 그렇지 않다면 이 원칙들은 사실 속에서, 하지만 혁명적이고 ‘봉기적’인 실천 내에서 실현되기 시작한다. 철학 자신의 원리들에서 도출된 이런 결론이 바로 마르크스가 이 지점에서 관념론을 유물론으로 전도한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이다.
관념론의 두 얼굴
-이런 이해가 정확하다면 이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이 물질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데(‘물질 없는 유물론’), 이는 엥겔스가 19세기 중반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자연과학과 통합하려는 기획에 착수하기 전까지 사실이었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유물론을 기존의 모든 유물론과 차별화함과 동시에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유물론의 원칙임을 선언했다면, 이는 관념론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열쇠는 유물론이 아니라 관념론이라는 단어 속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왜?’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첫 번째 이유는 철학자들이 제기한 자연과 역사에 대한 관념론적 해석들이 정신, 이성, 의식, 관념 등등과 같은 것들의 원칙들을 원용하고, 현실에서 혁명이 아니라 대중들에 대한 교육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더 큰 두 번째 이유는, 근대 철학 내에서 보편적인 것을 표현하는 범주들(의식, 정신, 이성)은 항상 두 가지 얼굴, 즉 표상과 주체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테제들’에서 마르크스가 제시한 정식화들은 부단히 이 두 가지 얼굴을 암시하고 있으며, 두 가지 관념들을 긴밀히 결합시킨다.
-분명 마르크스가 참조하는 ‘해석’이라는 통념은 표상이라는 관념의 변형태이다. 관념론에서 세계는 자신의 일관성과 ‘의미’를 보려 하는, 그리고 이를 통해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려 하는 그런 관조/사변의 대상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적․정치적 차원의) ‘세계의 질서’를 사고한다는 사실과 (‘무질서’뿐 아니라 ‘운동’에도 반대해) 세계 내의 질서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사실 사이의 확고한 결합 관계의 존재를 간파했다. 또한 이런 관점에서 마르크스는 정신 대신 물질을 채택하는 ‘이전의 유물론’ 또는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들이 강력한 관념론적 요소를 포함하기에 위장된 관념론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정확히 인지했다. 결국 마르크스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근대 관념론의 핵심이 세계의 질서와 ‘표상’을, 그것들을 ‘구성’하는 주체의 활동에 준거하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정확히 파악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표상의 철학(‘관념들’의 우위에 관한 단순한 철학)이 아닌 주체성의 철학(의식이라는 통념이 취하는 결정적인 중요성을 표현하는 철학)이라는 관념론의 또 다른 측면으로 이동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관념론이 말하는 주체적 활동은 사실 더욱 현실적인, ‘효과적인’ 활동, 또는 외적 세계의 구성인 동시에 형성, 또는 자기 자신의 변형인 그런 활동에 대한 흔적, 부인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마르크스의 ‘테제들’에서 다음과 같은 가설을 읽어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표상의 관념(해석, 관조)와 활동의 관념(노동, 실천, 변형, 변화) 사이에 갈등이 잠재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자 한다면, 근대 관념론은 자신이 행위하는 주체에게 부여하는 기능에 지니고 있는 유물론적 지향성을 감추고 있다. 마르크스는 이런 모순을 폭로하고 표상과 주체성을 분리해 실천적 활동이라는 범주 그 자체를 나타나도록 하려 했다.
주체, 그것은 바로 실천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기획에 성공했는가? 주체는 실천 이외에는 그 무엇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관념론’이 표상의 관점과 주체성의 관점을 동시에 포괄한다는 점에서, 관념론에서의 탈출에 성공했다고 하긴 어렵다. 주체성의 본질을 실천과, 실천의 현실성을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활동과 동일시하면서, 마르크스가 주체라는 범주를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전위시켰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를 그 용어의 관념론적 의미에서 ‘주체’로 표상할 수 있는 6 영원한 가능성을 예비했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근대의 시작부터 구체적 경험의 모든 영역과 관련되며 이 모든 영역을 통합할 수 있게 해주는 주체의 발명은 인류가 스스로를 형성하고 교육한다는 관념, 인류가 스스로에게 법칙을 부여한다는 관념, 결국 인류는 스스로를 해방한다는 관념과 연관되어 있다. 유적 주체(주체 일반)는 하나는 이론적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실천적인 두 가지 얼굴을 항상 갖고 있다. 이는 칸트에게는 인류였으며, 피히테에게는 인민과 민족이었으며 헤겔에게서는 ‘세계정신’, 즉 역사적 인민들이었다.
-프롤레타리아 안에서 진정한 실천적 주체,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고 세계를 변화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떠맡는 주체로 인지한다는 점, 결국 이런 사실을 이번에는 주체가 실천이라는 점을 주장하기 위해 활용한다는 점, 이 모든 것은 마르크스를 관념론의 역사에서 진정으로 벗어나게 해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심지어 극단적으로는 이것이 오히려 마르크스와 그 ‘실천의 유물론’을 관념론적 전통의 가장 완성된 형태로 만들어준다고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전위는 혁명적 경험을 연장하고 이 혁명적 경험을 근대 사회 내에서 구현하려는 시도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영원한’ 봉기의 과정 내에 있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관점의 채택이 관념론의 종말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와 이 프롤레타리아의 특권적인 역사적 역할에 대한 이론의 중심에서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의 차이로 인해 항상 재탄생하는 질문, 즉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의 딜레마를 확립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딜레마로 인해 대문 밖으로 쫓겨난 철학이 창문으로 다시 돌아오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인간적 본질’의 현실성
-여섯 번째 테제 7를 통해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이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노동과 의식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정의들을 나름대로 제시하고 있다. 《자본》1권에서 마르크스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인간은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정의를 인용하는데, 이는 기술 자체 또한 역사를 가지며 이 역사는 ’생산양식‘에 의존한다는 점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주장 8 또한 인간의 본질에 대해 사태[사물 또는 물질] 그 자체에서 답을 찾는 방식이며, 생물학적․기술학적인 모든 인간학에 출발점을 제시해준다.
-이론적 인간주의. 결정적 지점은 여섯 번째 테제가 인간적 본성을 정의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명시적으로 제기한다는 사실, 그리고 심지어는 이 질문을 근본적 철학적 질문으로 만든다는 사실과 구별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알튀세르가 이론적 인간주의라고 불렀던 문제설정으로 진입한다. 이 문제설정과 관련된 칸트, 빌헬름 폰 훔볼트, 포이어바흐 같은 이름들은 이론적 인간주의의 궤적이 관념론과 이 관념론에 대한 거부의 궤적과 해후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마르크스는 주체, 활동, 감각적 직관에 대한 이론들에 가했던 비판과 동일한 종류의 비판을 인간 본성에 관한 자신의 이론과 경쟁하는 이론들에 가한다. 마르크스의 테제는 그 질문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인간’,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본질’에 관해서도 이해되어왔던 방식을 근본적이고 급진적으로 전위시키려 시도하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스스로 만들어왔다. 첫 번째로 본질이 하나의 관념 또는 하나의 추상(‘보편적 개념’)이라는 점을, 두 번째로 이런 유적 추상이 동일한 유의 개인들 내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을 믿어왔다. 결국 마르크스가 말한 ‘앙상블’, ‘관계들’, ‘사회적’이라는 단어들은, 소위 실재론적 입장 9과 유명론적 입장 10을 동시에 거부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매우 놀랍게도 두 가지 입장 그 어느 것도 바로 인간 존재 내에 본질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사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를 정의하는 것은 바로 개인들이 서로와 함께 확립하며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관계들이다. 이 관계들은 매순간마다 복수의 형태들 하에서 ‘유’를 구성하며, 인간에게 적용되는 본질이라는 통념의 유일한 ‘현실적/유효한’ 내용을 제시한다.
-관개체적인 것. 마르크스가 활용하는 단어들은 개인주의적 관점(개인의 우위, 개인성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정의할 수 있다는 허구)과 유기체론적인 관점(전체의 우위, 분할 불가능한 단일체로서의 사회의 우위) 모두를 동시에 거부한다. 우리가 구성적 관계라는 이런 개념화를 특징짓기 위해 하나의 단어를 여섯 번째 테제에 추가한다면, 그것은 바로 관개체적인 것이다. 이는 인류를 관개체적 현실로 사고하고, 더 나아가 관개체성 자체를 사고한다. 이 관개체성은 각각의 개체 ‘내에’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것 또는 각각의 개체 외부에서 이 개체들을 분류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들의 복수의 상호작용이라는 사실로 인해 개체들 사이에서 존재한다.
관계의 존재론
-이 지점에서 소묘되는 ‘존재론’은 개인과 유 사이의 관계들에 대한 논의를 관계들의 다수성에 관한 연구 프로그램으로 대체한다. 이 관계들(이행, 전이 또는 통과) 내에서 개인들이 공동체와 맺는 유대가 형성․해체되며, 이 관계들이 역으로 이 개인들 자체를 구성하기도 한다. 가장 놀라운 점은 이런 관점이 하나가 다른 하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두 개의 극 사이의 완전한 상호성을 확립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관점이 지니는 단락 11이라는 특징을 통해 정치를 재발견하게 된다. 이런 관개체적 존재론은 최소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같은 언표들과, 개인의 실현을 공동체의 이해관계에 대립시키지 않으며 이 개인의 실현과 공동체의 이해관계 또한 전혀 분리하지 않으면서 항상 하나를 통해 다른 하나를 실현시키는, 혁명적 운동들의 실천과 공명하고 있다. 개인들만이 최종적으로 권리를 담지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정식화할 수 있지만, 이 권리의 쟁취 또는 해방, 게다가 봉기는 필연적으로 집단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을 통해 우리는 여섯 번째 테제와 세 번째 테제, 여덟 번째 테제 또는 열한 번째 테제가 사실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여기에서 지시되는 사회적 관계들은 끊임없는 변형, ‘영속혁명’과 전혀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는 유일하게 존재하는 현실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은 바로 혁명뿐이라고 말해야 했던 것이다.
슈티르너의 반론
-《독일 이데올로기》는 ‘테제들’의 영향을 받은 텍스트이지만, ‘테제들’과는 다른 또 하나의 언어로 말을 하고 있다. 이는 어떤 정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인데, 《독일 이데올로기》는 사실 본질적으로 또 다른 한 이론가의 도전에 대한 응답, 심지어 만족스럽지 못한 응답이다. 그 이론가는 막스 슈티르너이다.
-막스 슈티르너는 근대 국가에 맞서, 자신들의 신체, 자신들의 욕구/필요, 자신들의 관념의 ‘소유자/속성을 가진 자’인 모든 독특한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아나키스트이다. 특히 그는 근본적․급진적 유명론자인데, 이는 그가 ‘일반성’, 즉 모든 ‘보편적 개념’은 단 하나의 유일한 자연적 현실, 다시 말해 개인들의 다수성을 ‘지배’하기 위해 제도들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생각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슈티르너의 비판은 마르크스에게 위협적이었는데, 그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유들’뿐 아니라 어떤 예외도 없이 보편적 통념들 전체를 비판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거대 서사도 원하지 않으며, 모든 보편적 통념들은 실제로는/현실적으로는 추상물이며 허구들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의 저서는 인간들은 추상적 인류에 대한 숭배를 혁명 또는 혁명적 실천에 대한 숭배와 교환함으로써 얻는 것이 전혀 없고, 이런 교환을 통해 인간들은 훨씬 더 도착적인 지배 상태에 빠지게 될 위험이 있다는 비판의 사상적 원천이 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철학자들의 관념론과 본질주의를 비판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간주의적) 공산주의자들 또한 비판하고자 했기 때문에, 이런 반론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이에 마르크스는 슈티르너의 반론에 ‘프락시스’라는 자신의 상징적 통념을 생산이라는 역사학적이고 사회학적인 개념으로 변형함으로써, 철학에서는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질문인 이데올로기라는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응답했다.
《독일 이데올로기》
-‘프락시스’라는 상징적 통념을 생산이라는 개념으로 변형하는 것과 이데올로기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독일 이데올로기》 저서 전체는 자연의 형성과 변형을 위한 인간 활동 전체를 지시하는 일반적 의미인 생산이라는 통념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 ‘테제들’에서 예고된 ‘프락시스의 존재론’ 이후 《독일 이데올로기》가 ‘생산의 존재론’을 제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직접 말하듯, 인간 존재를 형성하는 것은 바로 생산이기 때문이다. 생산이 비가역적으로 자연을 변형함과 동시에 인간 존재를 변형하고, 그럼으로써 ‘역사’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자기 고유의 존재 수단의 생산, 즉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집합적인(관개체적인) 활동이다. 이와 상호적으로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가 생산의 자율적 구조로 구성되기 이전에 그 자체로 생산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이데올로기 비판은 사회적 존재를 생산의 발전[물]으로 인식하기 위해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현실의 전도임과 동시에 ‘지적 생산물들’의 자율화이기 때문에,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생산’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상호적 전제에 관해 언급한 이유이다. 슈티르너의 반론은 기각된다. 더 이상 추상화가 현실의 개인들을 대체한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이 추상들을 고발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대신 집합적 또는 사회적 조건들에 따라 개인들이 ‘보편적인 것들’ 등을 발생․생산하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런 사실로부터 전부[즉 실재론] 아니면 전무[즉 유명론] 사이의 동요(모든 추상물의 일괄적 수용 혹은 거부) 대신 현실적 인식을 표상하는 추상들과, 오인․신비화의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추상들을 구분하는 기준을 갖게 된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서 슈티르너의 입장에 내재한 허무주의는 원칙적으로 제거되지만, 그는 지배적 관념들에 대한 근본적․급진적 비판의 필요성을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명확히 인식한다.
혁명에 의한 역사의 전환
-《독일 이데올로기》는 사회 형태들의 논리적이면서 동시에 역사적 발생/기원을 제시하는데, 그 핵심 원리는 분업[노동 분할]의 전개이다. 분업의 모든 새로운 단계는 생산과 교환의 특정한 양식을 특징짓는다. 여기서 등장하는 시기 구분은 역사가 보편화됨으로써 이 역사가 인류사가 되는 과정의 전형적인 계기들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헤겔적 객관정신과는 정반대의 극에 위치해 있다. 마르크스에게 이런 보편화는 역사가 인류에 속하는 모든 개인과 모든 집단들 사이의 상호작용과 상호 의존으로 구성되게 되었다는 사실로 인한 것이다. 각각의 생산양식은 이 생산양식의 단순한 이면으로서의 전유와 소유의 역사적 형태를 포함하고 있기에, 분업은 사회집단들의 구성과 해체의 원리 그 자체이다. 이 사회집단들 각각은 모순되는 두 가지 얼굴을 가진 하나의 현실, 즉 상대적 보편화의 형태로서, 그리고 동시에 인간들이 맺는 관계들의 제한과 특수화의 형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발전의 출발점은 자연과 싸우는 인간들의 생산 활동이며,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현실적 전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반면 도착점은 서로 경쟁하는 사적 소유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서로 다른 교류의 형태들에 기반을 둔 ‘부르주아-시민’사회, 또는 그것이 내포하는 모순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절대적인 것[절대자]으로 전제된 개인성은, 소유가 대중에게는 현실적으로 일반화된 박탈/탈소유와 동일한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으로 대중에게는 생존 조건들의 절대적 ‘우연성’ 또는 불안정성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독일 이데올로기》의 하나의 테제는 ‘부르주아적’ 사회가 계급적 차이들이 모든 다른 차이들을 능가하며, 다른 차이들 모두를 지워버리는 그런 순간에서 출발해 비가역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 순간에 모순은 폭발적이고 첨예하게 발전한다. 각각의 개인은 인간 유의 잠재적인 대표자가 되며, 각 집단의 기능은 세계적 차원에서 수행된다. 이러한 논증은 이런 상황이 그 자체로 유지 불가능한 것이며, 논증 자체의 논리적 발전을 통한 [혁명적] 전환이라는 전제를 포함한다.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부르주아-시민사회의 형태들과 모순들이 완전히 발전하자마자 임박하게 된다. “생산력이 총체성의 단계에 이를 정도로까지 발전하는” 사회는 고립된 개인들의 힘으로서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으며, 인간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구성하는 잠재적으로 무한한 네트워크 내에서만 형성되고 실행될 수 있을 뿐이다. 모순의 ‘해소’는 ‘생산력 전체’의 집합적 통제/관리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보편적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다르게 말하면, 프롤레타리아는 역사의 보편적 계급을 구성한다. 마르크스의 텍스트 어디에서도 이와 같은 완결된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혁명적 변형과 공산주의가 임박했다는 주장은 방어해야 할 그 어떤 특수한 이해관계도 갖고 있지 않은 하나의 ‘계급’인 프롤레타리아와, 교환의 보편화 사이의 동일한 현재 내에서의 완벽한 일치에 기초해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그 어떤 표현에서도 완전히 배제된 현재의 프롤레타리아만이 자기 자신에 대한 더 이상 제한되지 않은 완전한 표현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부정적 보편성의 긍정적 보편성, 박탈의 전유, 개인성의 상실의 개인들의 ‘다면적’ 발전으로의 전도가 이루어진다.
-이 재전유는 동시에 모든 이에게 발생할 때에만 각자에게 발생할 수 있다. 혁명은 그 결과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그 형태의 측면에서도 공산주의적이다. 혁명은 진정한 자유다. 공산주의 내에서는 자유가 현실적인 것/유효한 것이 되는데, 이 공산주의는 내재적 필연성에 응답하기 때문이다. “이전의 부르주아-시민사회, 그리고 이 사회와 함께하는 그 계급들과 계급 적대들을 대신해,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이 되는 장소인 그런 연합체가 등장할 것”. ‘보편적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라는 테제는 임금노동자의 조건을 분업의 과정 전체의 결과, 즉 시민사회의 ‘해체’로서 제시하는 논거를 응축하고 있다. 이는 공산주의적 혁명이 임박했음을 현재 속에서 읽어낼 수 있게 해준다. 《공산주의자 선언》에 나오는 ‘당’은 완전한 성숙에 도달한, 자기 자신과 사회 전체를 위해 그 자체로 표현된 현실적 운동 그 자체일 것이다.
실천의 통일성
-결국 마르크스는 ‘탈출’에서 탈출한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단순히 철학으로 그냥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프락시스 또는 혁명적 실천이라는 통념이 모든 본질주의적 철학과의 이별을 고한다는 점을 선언했지만, 이 통념이 인간 본질의 또 다른 이름으로 등장할 수도 있다. 이 역설적 긴장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가 분석하는 생산으로 인해 강화된다. 생산의 경험적 역사 전체의 존재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프락시스와 포이에시스 사이의 구분을 제거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프락시스는 ‘시민들’이 자기 자신의 완성에 도달하기 위해 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만을 실현하고 자기 자신만을 변형하는 ‘자유로운’ 행위였다. 포이에시스는 [노예들이] 자연과의 관계, 물질적 조건들과의 관계라는 모든 제약들에 종속된 ‘필수적인’ 행위였으며, [인간이 아닌] 사물들의 완성, 사용 가능한 생산물의 완성을 추구했다. 마르크스는《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새로운 유물론의 기초를 제시한다. 프락시스에 대한 포이에시스의 우위가 아니라, 프락시스와 포이에시스 사이의 동일화라는 혁명적 테제. 물질적 변형이 아닌, 역사적으로 자신의 외부에 기입되지 않는 그런 현실적 자유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들이 자신들의 불변의 ‘본질’을 보존하면서도 자신들의 생존 조건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노동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테제는 고전적인 3항을 구성하는 세 번째 항, 즉 테오리아 또는 이론에 영향을 미친다. ‘테제들’은 모든 관조를 거부하고 진리의 기준을 실천과 동일시했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테오리아를 ‘의식의 생산’과 동일시한다. 즉, 테오리아를 의식의 생산이 산출해낸 역사적 모순의 항들 중 하나와 동일시한다. 이 항, 정확히 말해 이데올로기는 1845년 마르크스의 두 번째 혁신이며, 이 이데올로기를 통해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철학에게 실천이라는 거울에 자기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라고 제안하는 것이다. 하지만 철학은 이 거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지할 수 있었을까?
-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본문으로]
- 그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역사과학’이 진정한 그리고 실정적인 방식으로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본문으로]
- 마르크스는 하나의 실천, 즉 반동적이거나 반 민중적일 수는 없는, 기존의 질서를 폐지하는 혁명이라는 방식을 포함한 열한 번째 테제를 곧 포기한다. 그 이후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세계를 변화’시키는 역량을 목도하고, 이를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다양한 방식들이 존재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나의 변화가 다른 하나의 변화에 기입될 수 있는지, 이 다른 변화의 방향을 바꿔 자신의 흐름에서 이탈하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본문으로]
- 이 사회적 운동의 요구들은 자유의 실현을 평등의 실현이라는 기준으로 측정하고 평등의 실현을 자유의 실현이라는 기준으로 측정함으로써 형제애에 도달하기 위한 프랑스 대혁명의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한다. [본문으로]
- ‘청년 헤겔주의자들’은 행위의 철학을 제안했다. [본문으로]
- 즉, 우리가 다시 한 번 새롭게 세계를 ‘해석’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인 하나의 표상 또는 추상으로서의 주체, 마르크스 이후의 이론가들이 선험적인 방식으로 ‘역사의 의미/방향’을 이끌어낸 프롤레타리아라는 주체. [본문으로]
-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적 본질로 해소한다. 그러나 인간적 본질은 독특한[개별적] 개체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그 유효한 현실에서, 인간적 본질은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다.(…)” [본문으로]
- “인간은 인간이 자신들의 생산수단을 생산하기 시작하자마자 동물과 구분되는데, 자신들의 생산수단을 생산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인간의 신체적 조직화의 결과 그 자체인 인간의 진보이다. 자신들의 생산수단을 생산함으로써, 인간은 자신들의 물질적 삶 그 자체를 간접적으로 생산한다.” [본문으로]
- 유 또는 본질이 개인들의 존재에 선행한다고 사고. [본문으로]
- 개인들이 우선적 현실이며 이 우선적 현실에서 우리가 보편적인 것들을 ‘추상’한다고 사고. [본문으로]
- 단락은 잠재적 차이를 내포하고 있는 전기 회로의 두 점 사이를 갑작스럽게 연결시키는 것을 뜻하는 공학 용어. 잠재적 차이를 내포하고 있는 이질적인 두 항, 요소 혹은 점을 갑작스럽게 연결시켜 어떤 순간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추상적 행위를 의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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