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실학이란 무엇인가
‘실학’ 연구의 어제와 오늘(한영우)
1930년대 민족주의 국학자들이 본 ‘실학’
-역사상 ‘실학’을 학술용어로 쓰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민족주의 국학자들. 1934년 다산 정약용 서거 99주년을 맞아 정인보, 문일평, 안재홍 등이 다산의 학문을 정리하고, 이른바 ‘조선학’운동을 개시. 안재홍에 의해 개념화된 ‘조선학’은 ‘민족적이면서도 국제적인 성격으로’ 전통문화를 이해하려는 것으로, ‘고유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인식하려는 태도. ‘국제성’ 혹은 ‘보편성’은 ‘민주주의’를 의식하고 쓴 것으로 계급통합적 ‘신민주주의’를 의미.
-‘조선학’의 시각에서 바라본 ‘실학’은 자연히 ‘민족적이고 민중적(민주적)’으로 이해될 수 있었고, ‘현실적’인 성격도 가질 수 있었음. 예를 들어 안재홍은 정약용을 프랑스 루소에 비유하고, 그의 여전론과 전론(田論)에 피력된 토지제도를 ‘국가사회민주주의적 토지제도’로 이해하면서 이를 해방 후 조선국민당의 정강정책으로 수용하려 함. 그런데 ‘조선학’ 관점에서의 실학은 정약용이라는 특정 인물을 중심에 두고 설정. 이는 정약용이 진보적 성향이 강한 데도 원인이 있지만 정인보, 안재홍, 문일평 등의 출신배경이 비주류였던 탓도 있음. 자연히 조선후기 사상계의 주류인 노론은 물론, 소론, 남인에 대한 연구도 거의 없었으며, 조선후기 역사에 대한 관점도 정립되어 있지 않았음.
-일본 학계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음. 일본은 주자학이 전래되면서부터 실학이 대두하여 17~18세기 고학을 거쳐, 근대에 와서는 후쿠자와 유키치에 이르기까지 실학의 전통이 이어짐.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 주자학을 비판하며 등장한 고학파는 ‘실학파’로 불리기도 함. 한편, 일제시대 법제사가인 아사미 린타로는 1922년 저서 《조선법제사고》에서 다산 정약용을 실학자로 부르며 높이 평가. 한국 ‘조선학’ 학자들의 직접적 언급은 없으나 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부정하기 어려움. 그런데 아사미는 한국사가 세계사와 고립되어 문물이 매우 낙후되어 있다고 평가. 그는 정약용을 ‘반도의 행복’이라고 했는데 그 배경에는 한국사를 비참한 역사로 보는 전형적 식민사관이 바탕에 깔려 있었음.
-1930년대 정약용을 중심으로 ‘실학’을 탄생시킨 배경은 시대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음. 즉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의 현실적 요구와 동시에 식민사관에 젖은 일본학계의 영향이 동시에 작용. 양자 모두 조선시대를 비참하게 보았기에 공존이 가능했음. 결국 이 시기 학자들은 조선시대 사상계 전반에 대한 신뢰가 없고, 실증적 연구가 극히 부족한 상태에서 특정 인물 하나를 돌출시켜 성급히 개념화. 결과적으로 ‘실학’의 대칭은 ‘주자학’이 되면서 주자학을 ‘반민족적, 반민중적, 비실용적인 학풍’으로 평가.
1950년대 천관우의 ‘실학’ 개념
-해방 후 천관우, 홍이섭 등에 의해 1930년대 실학연구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짐. 천관우는 1952년 학부졸업논문 《반계유형원연구》에서 실학의 개념을 새롭게 정리. 그는 ‘실학’을 실정(實正), 실증, 실용을 특징으로 하는 조선후기 신학풍으로 정의. 17세기 한백겸, 이수광, 김육, 권문해 등이 그 선구자이며 그 뒤를 이어 유형원, 이익, 안정복, 박세당, 이중환, 신경준, 서명응 등이 나와 실학의 맹아가 싹트고, 19세기 북학파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성해응, 정약용, 김정희, 이규경, 최한기에 이르러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봄.
-천관우의 실학연구는 실학의 시기를 조선후기 300년으로 확장시키고, 당파상으로 남인, 소론, 일부 노론(북학파)을 망라하며, 1세기의 준비, 1세기의 맹아, 1세기의 전성으로 실학의 흥망성쇠를 정립시켰다는 것이 특징. 그의 실학 개념은 시간과 공간을 조선후기 전 시기로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진일보했으며, 유형원의 사상을 현대 역사학의 실증적 방법을 통해 분석했다는 점에서 의의. 그리고 실정, 실용에 실증을 실학의 특징으로 추가한 것도 주목됨. 이러한 실학의 사상사적 특성은 한마디로 ‘봉건’에서 ‘근대’로의 과도기적 사상. 실학과 반대되는 사상은 주자학으로 설정. 이상의 천관우의 실학접근은 ‘봉건’과 ‘근대’라는 대칭구도 속에서 파악한 것이 특징인데, 문제는 이러한 양극적 대칭구도가 역사적 진실성을 지니고 있는가. 조선시대가 봉건사회라는 대전제가 증명되지 않는 한 위와 같은 접근은 가설일 뿐. 한편 ‘실학’이라는 용어가 실제로 소위 ‘실학자’라고 규정하는 인물 사이에서만 사용되었느냐도 실증적으로 증명된 바 없음. 1970년대 천관우는 한우근의 비판에 대한 대응 취지로 〈조선후기 실학의 개념재론〉과 〈한국실학사상사〉를 발표. 재론에서 그가 밝힌 실학의 개념은 한마디로 실학을 ‘민족 지향(자주), 근대 지향(진보)’로 보아야 한다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님.
-홍이섭은 천관우가 정의한 실학개념을 바탕에 깔고 정약용 연구에 일가를 이룸. 그는 박사논문이기도 한 《정약용의 정치경제사상연구》(1959)에서 ‘봉건적’인 것에서 ‘근대적’인 것으로의 이행과정 속에서 정약용의 사상을 자리매김함. 여기서 주자학은 봉건적 사유, 실학은 주자학에서 벗어나려는 사상으로 이해됨. 홍이섭의 정약용 연구는 아사미 린타로의 영향을 받기도 함.
-실학을 근대사상의 맹아로 보려는 천관우의 실학개념은 조선후기에서 자본주의를 비롯한 자생적 근대화의 맹아를 찾으려는 후배 역사학자들의 광범한 호응을 얻어 지금까지 통설의 지위를 누려오고 있음.
1958년 한우근의 ‘실학’ 개념
-1950년대 후반 한우근은 천관우의 실학개념에 전반적 의문을 품음. 그는 1958년 발표한 〈이조 실학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실학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버리고 실제 기록을 통해 실학 개념에 접근. 《조선왕조실록》, 《문집》을 통해 확인된 ‘실학’은 조선후기의 고유용어가 아니라 고려말 이후 조선시대에 걸쳐 주자학 혹은 정주학을 가리키는 용어였으며, 중국에서도 삼대의 학문과 정주학이 ‘실학’으로 불렸음을 실증적으로 논증. 주자학이 실학으로 불린 이유는 사장학으로 빠진 고려시대 유학이 아니라, 유학 본래의 정신인 수기치인을 실천하는 주자학이 진정한 유학이기 때문. 한우근의 연구는 기존의 실학개념에 대한 정반대의 결론을 내린 것으로, 실학과 주자학을 대칭개념으로 보아온 연구경향을 의미를 잃게 됨. 한우근은 조선후기 ‘주자학’을 비판한 학자나 학문을 ‘경세치용의 학’이라는 말로 대신할 것을 제안하고, 그 대표적 학자로 성호 이익을 연구.
-한우근의 실학해석은 실학이라는 용어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밝히려 했고, 주자학도 실학의 범주에 넣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사상사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음. 그동안 비판적으로 평가된 주자학 연구를 촉발시키기도 함. 그러나 한우근의 실학개념 연구는 그 용어 실체를 찾아내는 데는 공헌했으나, 주자학 혹은 실학의 사상사적 내용과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진 못함. 수기치인, 경세치용 등의 용어는 초시대적이고 추상적인 용어로 특정시대 사상을 해석하는 용어가 되긴 어려움. 또, 조선시대 유학의 주류는 자신의 학문을 주자학 혹은 정주학보다는 성리학으로 보편적으로 지칭했다는 문제가 있음.
1970년대 이우성의 실학개념
-천관우와 한우근의 실학개념이 대립되는 가운데 조선후기 사상을 ‘실학’으로 불러야 한다는 입장에서 실학 개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틀을 제시하고 나선 것은 1970년대의 이우성. 그는 1973년에 발표한 〈실학연구서설〉에서 실학을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세 분야로 나눌 것을 제안. 경세치용은 제도개혁을 주장한 유형원, 이익 등 초기 실학자들의 학풍을, 이용후생은 과학과 기술, 상업의 중요성을 주창한 18세기 후반 북학파의 사상을, 실사구시는 청대 고증학을 수용한 김정희 등 19세기 이후의 실학을 가리킴.
-이우성의 실학개념은 실학의 성격이 하나가 아니고 시기에 따라 그 성격이 변해간다는 것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음. 그러나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라는 용어의 모호성이 문제. 세 용어는 뉘앙스의 차이는 있지만 얼마든지 중복되고 상통될 수 있는 용어. 또 초역사적이고 추상적 개념이라는 것도 문제. 경세치용에서 이용후생을 거쳐 실사구시로 변해간 것이 사상의 발전에서 어떤 의미인지 밝히지 못함.
1980년대 지두환의 실학 개념
-1970년대 이후 실학에 대한 관심이 냉각됨. 첫째, 박정희 정부의 반민주적이고 폭압적 ‘근대화정책’에 대한 반발로 근대지향적 사상으로 평가된 실학에 대한 관심이 떨어짐. 둘째, 조선후기 사상사연구가 마음에 맞는 실학자들을 찾아내는 투망식(投網式) 접근을 벗어나며 조선시대 사상계의 주류인 성리학에 대한 전반적 연구가 진행됨. 한편, 1970년대 이후로 주자학이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도 주목할 일. 조선시대 학자들이 주자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일이 거의 없고, 성리학, 이학, 정학, 성학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함. 또한 성리학 연구가 심화되면서 성리학의 긍정적이고 진보적 요소들이 밝혀지게 되었으며, 그동안 실학자로 추앙된 인물들의 사상과 근본적 차이가 없다는 것도 확인됨.
-조선시대 사상사 연구 성과에 따라 실학 개념도 자연히 재론됨. 지두환이 1987년 발표한 〈조선후기 실학연구의 문제점과 그 방향〉은 새로운 연구경향을 반영함. 그의 실학개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종전의 실학 개념과 다름. 첫째, 조선시대에 실제 사용된 ‘실학’이라는 용어는 과거시험에서 강경(講經)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문장으로 답을 적는 사장(詞章)과 대비되는 것. 둘째, 북학이 근대지향적이고 북학만이 진정한 실학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함. 그 이유로 다섯 가지를 들었음. 첫째, 철학적으로 성(性)을 이(理)로 보는 성리학을 극복. 둘째, 성리학의 화이론과 정통론을 탈피. 셋째, 농업중심 산업구조와 신분제를 바탕으로 한 지주-전호관계를 인정하는 성리학에서 탈피하여 농상공업의 균형적 산업구조를 바탕으로 경제적 지주-소작관계만을 인정함. 넷째, 고증을 소홀히 한 성리학과 달리 북학은 청조고증학을 도입하여 철저한 전거주의를 지향. 다섯째, 성리학이념을 탈피하는 소설을 씀.
-지두환의 실학 개념은 ‘근대 지향’에 기준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선배학자들의 실학 개념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음. 그는 북학 이전의 주자성리학이나 17~18세기 조선성리학을 ‘중세적인 사상’으로 규정. 그럼에도 진일보한 측면은 17~18세기에 대한 연구성과를 수용하여 조선시대 사상사를 조선전기의 주자성리학 → 17, 18세기의 조선성리학 → 18세기 말 이후의 북학으로 시대구분한 것. 그러나 2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는 지두환의 실학 개념도 문제가 있으며,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실학 개념을 재정립할 단계에 와 있음.
대안1: 실용적 성리학이 실학
-조선 후기에는 국가를 경영하고 국리민복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 학문을 실학으로 보는 단계로 발전. 즉, 수기치인의 원론이 아니라 그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는 학문을 곧 실학으로 부르는 용례가 발견됨. 17세기 이수광(실효, 실득, 실덕, 실심, 실공, 실정을 강조), 18세기 안정복(형이하의 학문, 즉 인생일용지사를 실학이라고 정의), 영조의 유형원 실학 평가, 정조(경세실용지학, 실심실학, 실공, 실덕, 실지사공, 실용 등의 용어 사용)의 사례 등이 있음. 이상과 같이 실용적인 학문, 즉 학문과 사공(事功)이 일치하는 학문을 실학으로 불렀던 것을 알 수 있음.
대안2: 교조적 주자학은 과연 있었는가
-우리나라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주자학이 전폭적으로 교조적으로 수용된 시대는 없다고 보아야 하며, 어느 시대이든 ‘조선성리학’으로 보는 것이 옳음. 조선 초기에는 원대와 명대를 거쳐 관학화된 주자성리학을 수용하여, 특히 권력구조와 관련된 일부를 받아들임. 16세기 사림의 등장으로 주자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것은 사실이나, 이전의 국가체제를 비판하고 향촌자치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일부를 수용했을 뿐. 서경덕, 조식이 독자적 기철학을 발전시켜 뒤에 북인으로 결집된 것도 특징. 17~18세기에도 율곡 이후의 ‘조선성리학’이 주류였다는 주장은 서인 위주로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며, 이 시기 주자성리학과 구별되는 육경고학, 주자의 경전주석에 대한 비판이 유행. 17~18세기 사상계는 하나의 흐름으로 보기 어려운데, 병자호란과 명의 멸망을 기점으로 사상계의 동향이 매우 다르기 때문. 호란 이후 주자의 반청정서가 큰 호소력을 가지고 주자학에 대한 경도가 상대적으로 가장 크긴 했으나, 주자를 비판한 윤휴, 박세당 등의 사례에서 보듯이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조류도 존재.
-16세기 말~17세기 전반기 임진왜란이라는 대규모 국제전쟁을 경험하면서 국가경영방식이 달라지고, 명으로부터 새로운 사조의 유입으로 사상계 전반의 변화가 발생. 왕양명과 육구연의 심학, 북송 학자 소옹의 역학, 명나라 이반룡, 왕세정 등의 고문사, 서양 선교사들이 가져온 서양의 과학과 기술, 서학 등이 영향을 줌. 왜란 전후의 사상계는 ‘주자성리학’이나 ‘조선성리학’보다는 오히려 육경고학이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보는 게 사실에 가까움.
대안3: 서울 지역의 육경고학이 실학의 선구
-물론 성리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으나, 육경고학은 주자성리학과는 여러 측면에서 다름. 첫째, 육경고학은 우선 소의경서(所依經書)에서 사서삼경을 뛰어넘어 육경(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 주례)의 세계로 들어가고, 주자의 주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경전해석을 추구. 둘째, 양명학, 노장사상, 단학, 선불교, 제자백가, 천문, 지리, 의약, 복서 등 잡학, 천주교, 법가 등에 대해서도 이단으로 배척하지 않고 심학의 차원에서 너그럽게 포용. 셋째, 도덕적 관점에서 우주를 바라보는 주자학과 달리 북송대 학자 소옹의 물아일체론, 물아평등론, 이물관물론에 주목하여 만물을 인간과 평등하게 바라보는 우주관을 열어놓기도 함. 넷째, 문학에서도 송대의 문장과 시에 비판적이었으며, 문장은 진한 이전의 고문을, 시에서는 성당(盛唐)의 시를 최고로 꼽음(당시의 성행). 다섯째, 정치관에서 황극탕평론과 군사론을 바탕으로 한 왕권강화를 추구하고, 왕도와 패도, 의리와 공리, 인정과 형벌의 조화를 추구. 예학에서도 군례와 신례를 차별하여 예송논쟁으로 이어지게 된 것.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 군사론도 이들의 주장이 수용된 것. 여섯째, 부국강병을 지향하여 국가가 적극 개입하는 상공업과 화폐경제에 대한 관심도 높았으며, 토지제도에서는 정전제에서 새로운 모델을 찾으려 했음. 마지막으로 역사도 도덕적 관점에서만 접근하지 않고 물질적, 제도적 기반에서 이해하려고 노력.
-육경고학자의 대표자는 한백겸과 이수광이었으나, 서울의 이른바 침류대학사(枕流臺學士)들 가운데에서도 유사한 학문경향을 받은 이들이 존재했음. 육경고학은 윤휴, 허목, 이익, 정약용 등을 통해 경기남인의 학풍으로 이어졌으며, 정조도 이를 높이 평가하고 왕권강화론을 수용. 한편, 육경고학은 남인에게만 수용된 것은 아니며 17세기 말~18세기 서울의 예단(藝壇)을 이끌어간 노론계 김창협, 김창흡 형제나 이들과 관련이 있는 소위 진경문화도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 없음. 또한 18세기 호락논쟁에서 서울 낙파의 인물성동론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짐작되며, 북학의 이용후생론, 명물도수학도 무관하다고 볼 수 없음. 이와 같이 왜란 전후로 서울과 근기지방에서 일어난 육경고학의 전통은 18세기 말까지 지속됨. 여기서 당파적 친화성보다 지역적 근접성이 더 큰 요인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음. 끝으로 일본에서도 17세기 중반 이후 주자학을 비판한 고학(古學)이 대두했음을 유념해야 함.
대안4: ‘중세’와 ‘근대’의 이분법 극복
-조선시대를 ‘중세’와 ‘근대’의 이분법으로 접근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음. 먼저 그 개념 정의가 명확하지 않은데, 중세를 ‘봉건사회’로 근대를 ‘자본주의사회’로 본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는 것을 의미. 그러면 조선시대를 봉건사회와 자본주의사회라는 구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타당한가. 정치적 중앙집권의 확립, 관료제도의 운영,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제도, 시험에 의한 능력주의 관리등용제도 등에서 조선이 서양식 봉건사회와 같다고 볼 수 없음. 그 외 막스 베버의 ‘녹봉제적 봉건사회’, 북한의 ‘토지사유권이 국가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는 주장, 영세농의 존재를 농노로 보는 주장, 신분제 미극복을 봉건사회로 보는 주장 등을 수용할 수도 없음.
-조선 후기를 근대자본주의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없음. 자유상업, 자유수공업의 발전, 상품화폐경제의 성장, 국역노동을 대체하는 고임제도(雇賃制度)의 확대 등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식민지 개척과 자본 축적, 산업혁명, 시민혁명 등은 존재하지 않았음. 조선 후기 사상에서도 자본주의사회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실현하려는 사상은 없었음. 조선후기 지성사의 기본 흐름은 현실적으로 부국강병을 추구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유교적 이상주의에 입각한 대동사회를 지향.
-즉, 조선후기는 서양의 봉건사회보다 한층 진보적인 사회이나, 서양의 근대사회보다는 산업구조가 한층 뒤떨어진 사회. 사상적으로도 서양의 근대사상과는 달리 ‘개인과 공동체가 조화된 도덕적 자기완성’을 추구. 아직 우리는 이상과 같은 특성을 지닌 우리 역사의 발전과정을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만들지 못함.
-유교적 이상주의가 최고의 수준에 이른 조선후기를 ‘근세적 유교사회’라는 독자의 용어로 개념화하기를 제안. 조선후기 300년은 ‘유교적 이상주의를 바탕으로 근세 유교국가의 중흥을 이룩한 시대’이며, 19세기 후반 이후 서양과 만나며 법고창신의 ‘한국적 근대’로 나아가는 이행기로 이해할 수 있음. 1897년 대한제국은 바로 전통과 서구가 조화된 ‘한국적 근대국가’로 볼 수 있음.
대안5: 실학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왜란 전후 주자성리학을 비판한 육경고학은 ‘실학’으로 부를 수 있으며, 그 대칭관계에 있었던 주자성리학을 실학으로 명명하기는 어려움. 18세기 후반 북학은 육경고학의 연장선상에서 발전한 것으로 실학으로 인정할 수 있으며, 북학에 반대하는 학풍은 실학의 범주에서 제외해야 함. 19세기 전후 북학은 청조 고증학을 수용하여 학문의 실증성, 전문성, 과학성을 강화시킴. 다만 학문의 실천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으며 학문과 정치의 독립적 분화가 이루어짐.
-즉, 왜란 전후부터 시대를 앞서가는 학문이 꾸준히 이어져 18세기 중흥을 이끌어내고, 그 이후 보완되며 개화사상으로 연결됨. 육경고학과 북학이 바로 그것이며 이를 ‘실학’으로 부를 수 있음.
대안6: 미래의 ‘신실학’
-‘근대 지향’에 매달릴 필요 없이 ‘탈근대’에 필요한 생명과 평화의 관점에서 실학을 바라볼 필요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