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 판서 이이(李珥)가 졸하였다. 이이는 병조 판서로 있을 때부터 과로로 인하여 병이 생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악화되었으므로 상이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하였다. 이때 서익(徐益)이 순무 어사(巡撫御史)로 관북(關北)에 가게 되었는데, 상이 이이에게 찾아가 변방에 관한 일을 묻게 하였다. 자제들은 병이 현재 조금 차도가 있으나 몸을 수고롭게 해서는 안 되니 접응하지 말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이이는 말하기를,

 

"나의 이 몸은 다만 나라를 위할 뿐이다. 설령 이 일로 인하여 병이 더 심해져도 이 역시 운명이다."

 

하고, 억지로 일어나 맞이하여 입으로 육조(六條)의 방략(方略)을 불러주었는데, 이를 다 받아 쓰자 호흡이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하더니 하루를 넘기고 졸하였다. 향년 49세였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너무도 놀라서 소리를 내어 슬피 통곡하였으며 3일 동안 소선(素膳)을 들었고 위문하는 은전을 더 후하게 내렸다. 백관의 요우(僚友)와 관학(館學)의 제생(諸生), 위졸(衛卒시민(市民), 그 밖의 서관(庶官이서(吏胥복례(僕隸)들까지도 모두 달려와 모여 통곡했으며, 궁벽한 마을의 일반 백성들도 더러는 서로 위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백성들이 복이 없기도 하다.’ 하였다. 발인하는 날 밤에는 멀고 가까운 곳에서 집결하여 전송하였는데, 횃불이 하늘을 밝히며 수십 리에 끊이지 않았다. 이이는 서울에 집이 없었으며 집안에는 남은 곡식이 없었다. 친우들이 수의(襚衣)와 부의(賻儀)를 거두어 염하여 장례를 치룬 뒤 조그마한 집을 사서 가족에게 주었으나 그래도 가족들은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서자(庶子) 두 사람이 있었다. 부인 노씨(盧氏)는 임진 왜란 때에 죽었는데 그 문에 정표(旌表)하게 했다.

 

이이의 자는 숙헌(叔獻)이고 호는 율곡(栗谷)이다. 나면서부터 신이(神異)하였고 확연히 큰 뜻이 있었다. 총명하여 지혜가 숙성해 7세에 이미 경서(經書)를 통달하고 글을 잘 지었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12세 때 아버지가 병들자 팔을 찔러 피를 내어 드렸고 조상의 사당에 나아가 울면서 기도하였는데 아버지의 병이 즉시 나았다. 학문을 하면서 문장 공부에 힘쓰지 않았어도 일찍부터 글을 잘 지어 사방에 이름이 알려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비탄에 잠긴 나머지 잘못 선학(禪學)에 물이 들어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도(佛道)를 닦았는데, 승려들 간에 생불(生佛)이 출현했다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잘못된 행동임을 깨닫고 돌아와 정학(正學)에 전념하였는데, 스승의 지도를 받지 않고서도 도의 큰 근본을 환하게 알고서 정미하게 분석하여 철저한 신념으로 힘써 실행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후에는 청현직(淸顯職)을 여러 번 사양하였으며, 그 도를 작게 쓰고자 아니하여 해주(海州)의 산중으로 물러가 살면서 강학(講學)하며 후학을 교육시켰다. 이에 은병 정사(隱屛精舍)를 세워 주자(朱子)를 사사(祠祀)하며 정암(靜菴퇴계(退溪)를 배향(配享)하여 본보기로 삼았는데, 나아가고 물러남과 사양하고 받아들이는 일을 한결 같이 옛 사람이 하던 대로 하는 것을 스스로의 규범으로 삼았다.

 

어려서부터 장공예(張公藝)가 구세 동거(九世同居)한 것을 사모하여 항상 그림을 걸어놓고 완미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맏형수에게 신주(神主)를 받들어 함께 살기를 청하여 모시고 아우와 자질(子姪)을 모아 의식(衣食)을 함께 하면서 세시(歲時)와 초하루 보름에는 이른 아침에 찾아 배알하는 등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대로 하였다.

 

아래로 비복(婢僕)에 이르기까지 참알(參謁)하고 출입하는 데 모두 예식이 있었는데 별도로 훈사(訓辭)를 만들어 한글로 번역해서 가르쳤으며 규문(閨門)이 마치 관부와 같았다. 한 당()에 모여 식사를 하고, 연주하고 노래하며 놀 때에도 모두 예절이 있었다. 당세에 예의를 강구하여 초상 때와 제사 때에 정성을 다한다고 이름난 사람이라도 가정 교육의 예절에 있어서는 모두 따를 수가 없었다. 매양 아버지를 일찍 여읜 것을 슬퍼하여 중형(仲兄)을 아버지 섬기듯이 하여 성심과 성의를 다하고 게을리함이 없었다. 그리고 서모(庶母)를 친어머니 섬기듯이 하여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보살폈으며 저녁과 아침마다 정성으로 문안드렸다. 또 녹봉도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았는데, 학자들이 그것은 예()가 아니라고 하자, 이이는 말하기를,

 

"내 의견이 그러할 뿐인데, 본보기가 될 수는 없다."

 

하였다.

 

조정에 나아가서는 위를 섬김에 있어 갈충 진력하였으며 시골에 물러나 있을 때에도 애타는 심정으로 잊지 못하였다. 전후에 걸쳐 올린 봉장(封章)과 면대하여 아뢴 말들을 보면 그 내용이 간절하고도 강직한데, 치체(治體)를 논함에 있어 규모가 높고 원대하여 삼대(三代)의 정치를 회복하는 것으로 목표를 삼았다.

 

나라 형세가 쇠퇴해져 난리의 조짐이 있음을 분명히 알고는 항상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조정을 화합하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고, 폐정을 고치고 생민을 구제하고 무비(武備)를 닦는 것으로 급무를 삼았다. 그리고 이를 반복해서 시종 일관 한 뜻으로 논계하였는데, 소인이나 속류의 배척을 당했어도 조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임금도 처음에는 견제를 가하였으나 늦게나마 다시 뜻이 일치되어 은총과 신임이 바야흐로 두터워지고 있는 때에 갑자기 졸한 것이다.

 

이이는 타고난 기품이 매우 고상한데다가 수양을 잘하여 더욱 높은 경지에 나아갔는데, 청명한 기운에 온화한 분위기가 배어나오고 활달하면서도 과감하였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상황이든 한결같이 정성되고 신실하게 대하였으며, 은총과 사랑을 받거나 오해나 미움을 받거나 털끝만큼도 개의치 않았으므로 어리석거나 지혜있는 자를 막론하고 마음으로 그에게 귀의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 시대를 구제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기 때문에 물러났다가 다시 조정에 진출해서도 사류(士類)를 보합(保合)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아 사심없이 할 말을 다하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꺼리는 대상이 되었는데, 마침내 당인(黨人)에게 원수처럼 되어 거의 큰 화를 면치 못할 뻔하였다. 이이는 인물을 논하고 추천할 때 반드시 학문과 명망과 품행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진실되지 못하면서 빌붙으려는 자들은 나중에 많이 배반하였다. 그래서 세속의 여론은 그를 너무도 현실에 어둡다고 지목하였다.

 

그러나 이이가 졸한 뒤에 편당이 크게 기세를 부려 한쪽을 제거시키고는 조정을 바로잡았다고들 하였는데, 그 내부에서 다시 알력이 생겨 사분오열이 되어 마침내 나라의 무궁한 화근이 되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때에 이르러서는 강토가 무너지고 나라가 마침내 기울어지는 결과를 빚고 말았는데, 이이가 평소에 미리 염려하여 먼저 말했던 것이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건의했던 각종 편의책(便宜策)들이 다시 추후에 채택되었는데, 국론과 민언(民言)이 모두 이이는 도덕과 충의의 정신으로 꽉 차 있어 흠잡을 수 없다.’고 칭송하였다.

 

저서로 문집과 성학집요(聖學輯要)·격몽요결(擊蒙要訣)·소학집주(小學集注)개정본이 세상에 전해 온다.

 

선조수정실록 18, 선조 1711일 기묘 1번째기사 1584년 명 만력(萬曆)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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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부세제도와 농민생활(송양섭)

 

머리말

-조선왕조의 부세제도는 전이 있으면 조()가 있고, 신이 있으면 역()이 있고, 호가 있으면 공물(貢物)이 있다고 하여 당의 조용조(租庸調) 제도를 이념형으로 하여 각기 토지·인신·호에 대응하는 형태로 이루어짐. 이는 국가기구 유지와 운영의 재정적 토대이며, ‘균부균세(均賦均稅)’의 이념에 의한 민과 토지지배의 구체적 표현. 민의 처지에서 본다면 조세와 부역은 생산활동과 별도로 삶을 규정하는 중대한 요소. 국가는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토지와 민을 공적 파악 대상으로 편입시키고자 한 반면, 민은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저항함.

 

전세제도의 변화

-과전법에서 수조율은 10분의 1, 15분의 1을 지세로 납부. 수조율은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에 의해 농작상황에 따라 차등을 두었으나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 1444년 세종대에 확정된 공법(貢法)은 문제를 개선하고 농업생산력의 발달에 걸맞는 전세수취를 도모함. 공법으로 수조율은 1/20로 하향조정되었으며, 전분6등제와 연분9등제로 수취율을 탄력적으로 조절. 하지만 16세기 이후 수조지분급제의 소멸, 사적지주제의 확대를 통한 재지사족의 성장으로 전세수취는 지주세력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편되어, 연분은 점차 하하년으로 고정되었고, 1635년 인조대 영정법(永定法)으로 결당 전세액은 4두로 법제화.

-양전(量田)을 통해 파악된 토지는 전세 징수의 근거. 전세 수치는 그 해의 작황과 시기전(時起田)을 조사하는 행심(行審), 면세결을 확정하는 표재(俵災), 납세자를 조직하는 작부(作夫)의 과정을 거침. 특히 작부제4결이나 8결 단위로 납세자를 조직하고 호수(戶首)가 조세납부를 책임지는 형태였는데, 관에 납부하는 액수와 실제 수취액의 차감분을 호수가 차지하는 양호방결(養戶防結)’로 많은 문제를 드러냄. 18세기 중엽 실시된 비총제(比摠制)는 호조에서 산출한 과세총수와 그해의 풍흉에 상당하는 연도의 실총을 비교하여 실총(實摠)과 재총(災摠)을 산출해 각도에 배분하면 감사가 각 읍에 분배하여 수취하는 형태. 전세감면권을 수령에게 넘기고 중앙정부는 해당년도의 수취총액만을 관철하여 전세수입의 안정적 확보를 도모함.

-다양한 명목의 부가세가 토지로 집중되는 경향이 점증. 훈련도감 재원조달을 위한 삼수미 부과, 대동법에 따른 공물의 토지세화, 균역법의 군포 감필분 보전을 위한 결전(結錢) . 19세기 무렵 토지에 부과되는 결당 전결세(田結稅)의 총액은 대략 조 100두 정도로 산정. 특히 군포·환곡 등의 감축·손결분까지 도결(都結)이라는 이름으로 부과되어 막대한 양에 이름. 1862년 농민항쟁에서 주요 이슈가 됨.

 

2. 공납제와 대동법

-공납제는 각 지역에 토산물을 할당, 현물로 수취하여 국가의 수요품을 조달하는 제도로 대체로 공물(貢物)과 진상(進上)으로 구성. 공물은 공안(貢案)에 수록된 정규적인 상공(常貢)과 수시로 거두는 별공(別貢)이 있었으며, 그 부과는 해당지역의 결수와 호구수가 참작되었지만 기준이 불분명하고 수취과정도 지방관과 향리에게 맡겨져 처음부터 문제가 존재. 한편 진상은 국왕과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예헌(禮獻)’의 방식으로 상납하는 것으로서 공물과 마찬가지로 군현단위로 배정되어 민호에 부과. 공물·진상은 그 자체의 부담 뿐 아니라 운반·수송에 소요되는 노동력도 요역의 형태로 제공해야 했으며, 토산물을 배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구조적 모순이 있었음. 이는 공물의 대리납부, 방납(防納)을 가져와 소농민의 몰락을 초래하여 공납제 개혁문제를 중대현안으로 부각시킴. 지방에서는 공물가격을 미곡의 형태로 수취하여 방납으로 내는 관행이 확산되어 이를 사대동(私大同)이라 하는데, 대동법은 이러한 사대동의 관행을 국가적 차원에서 공인한 것.

-대동법의 선구적 형태는 임진왜란 중 유성룡의 건의로 일시 채택된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광해군 즉위 직후 경기지역에서 처음 실시된 대동법은 충청·전라·경상도로 확대되어 1708년 숙종대 전국적 시행. 함경·강원·황해도에는 상정법(詳定法), 평안도에는 수미법(收米法)이 채택되었으나 본질적으로 대동법과 다르지 않음. 대동법의 전국적 시행이 1세기가 소요된 데에는 지주층과 방납인들의 반대가 격렬했으며, 양전의 미비로 토지파악이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 대동법은 가호 단위로 부과하던 부담의 대부분을 토지세로 편입시킨 것으로 국가재정의 궁핍과 농민의 몰락에 직면하여 채택된 개혁.

-대동미는 대략 결당 12 정도로, (()으로 대납하기도 함. 선혜청은 각처에서 대동미를 거두어 공인(貢人)에게 지급하여 국가의 수요품을 조달. 대동법의 시행은 공물·진상의 상당부분을 지세화, 각종 역역(力役)의 물납화·금납화 촉진, 국가재정도 어느 정도 안정화. 방납인에서 합법적 지위를 획득한 공인층은 대상인으로 성장하여 상업과 수공업 발전에도 영향. 대동미는 처음에는 유치미(留置米) 명목으로 지방관아의 경비로 일정량이 비축되고 나머지는 중앙으로 상납되었으나, 18세기 이후 중앙재정 수요 증가로 상납미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지방재정의 곤란을 초래.

 

3. 군역과 요역

-조선왕조는 국가가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신역제(身役制)를 바탕으로 징발하였는데 대부분이 군역과 요역. 군역은 병농일치의 이념 아래 호적대장을 토대로 파악된 16~60세의 남정에게 부과, 이념적으로는 천인을 제외한 모든 계층을 대상으로 양인개병(良人皆兵)의 원칙(양반은 군역에서 제외). 군역부과의 단위는 직접 군영을 담당할 정군(正軍), 이를 재정적으로 보조하는 봉족(奉足)으로 이루어졌으며, 군호(軍戶)는 여러 변화를 거침. 16세기 이후 값을 지불하고 다른 사람을 대신 세우는 대립(代立), 실제 복무를 하지 않고 포를 거두는 방군수포(放軍收布)가 확산되며 군역은 광범위하게 납포군(納布軍)으로 변모.

-17세기 군역은 양인개병 원칙이 허구화하고 양인만이 부담하는 양역(良役)으로 변모, 신분제에 입각한 특권적 부세화. 특히 양란 이후 대규모 군영이 속속 창설되고 군액이 폭증하면서 군역제 운영의 심각한 모순(백골징포, 황구첨정 등의 폐단)이 드러나며 농민층은 여러 가지 피역(避役)으로 대응. 17세기 후반부터 양역변통론이 활발히 제기되었으나 논란 끝에 감필론이 채택, 1751년 영조대 균역법(均役法)의 실시로 군역부담을 1필로 감필균일화(減疋均一化). 그러나 100만 필에 달하던 군역수입이 50만 필 정도로 줄어든 상황에서 대체재원이 강구되어야 했고, 이른바 급대(給代)’ 명목으로 어염선세(漁鹽船稅), 은여결(隱餘結), 이획(移劃),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결전(結錢) 등이 색출됨. 이들 재원이 균역청에 귀속되면서 수입의 상당부분을 의존하고 있던 지방관청은 만성적인 재정난을 겪음.

-18세기 중엽 양역실총(良役實摠)의 간행으로 상당부분의 군역이 정액화. 그러나 재정난에 시달리던 지방관청은 각종 잡다한 역종(사모속, 私募屬)을 만들어 재원을 충당하고자 함. 전국적인 군역자원의 부족(군다민소, 軍多民少) 현상이 일어나면서 양반사족층도 공동납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 1871년 고종대 호포법도 이 관행을 법인화한 것.

-요역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정기·부정기적으로 징발·사역하는 제도로 경작토지 규모를 기준으로 하는 계전제(計田制)를 쓰다가 16세기 이후 신역제의 전반적인 물납화 추세 속에서 같은 과정을 밟았음. 국가의 각종 토목공사에 동원되는 노동력은 값을 지불하고 고용하는 모립제(募立制) 확산, 대동법으로 공물과 진상과 관련 요역의 상당부분은 지세화, 군현단위의 각종 요역도 잡역세 명목으로 물납화.

 

4. 환곡제도

-환곡제는 과거의 제도를 계승하여 국가 차원에서 곡물을 비축하여 대여함으로써 농민의 재생산기반을 돕기 위한 제도. 또한 국가의 갑작스러운 재정수요에 응하고 재해나 흉년에 대비한 예비재정으로서 정부는 비축곡을 확보하고자 노력. 하지만 환곡의 농민진휼이라는 성격은 점차 변질. 본래 대출 곡물의 10퍼센트를 이자로 거둬들이도록 규정했으나, 점차 국가재정에 편입되고 재정보용을 목적으로 30퍼센트까지 거둘 수 있게 변화함.

-18세기 들어 환곡은 각 기관의 재정 확보를 위한 사실상 부세의 한 부문으로 변질. 특히 균역법으로 지방재정의 상당수가 중앙으로 이속되면서 환곡을 통한 수입이 지방관청의 새로운 재원으로 떠오름. 18세기 초 약 500만 석이던 환곡총수는 18세기 말~19세기 초 약 1000만 석까지 상승, 90~100퍼센트까지 치솟은 회록율(會錄率), 진분(盡分)의 일상화, 강제로 맡기는 늑대(勒貸), 이자만을 수취하는 와환(臥還) 등 여러 폐단. 19세기 들어 이러한 양상은 더욱 격화되고 지방관의 횡포나 향리들의 농간이 겹치며 문제는 심화. 1862년 농민항쟁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이 환곡의 폐단.

 

5. 조세부담과 농민생활

-15세기 무렵 조선은 사실상 휴한농법의 극복과 연작상경의 단계, 강력한 공권력을 바탕으로 국가수조지와 공민의 확보에 주력하여 국가운영의 물적토대를 삼고자 함. 15세기 과전법체제 하 조세와 국역부담의 기축은 양인자영농민. 이들은 국가의 수취체제에 얽매여 생활기반을 크게 제약당함. 전세수취를 위한 답험이나 수세과정에서 편파적 부담을 감수. 군역은 세조대 보법시행으로 군역부담층이 대폭 확대되는 과정에서 농민층의 유리유망을 가속화하고, 16세기 이후 양반사족층이 군역으로부터 이탈하자 상황은 더욱 악화. 공납은 모호하고 복잡한 수취기준의 문제와 수령과 방납배의 결탁으로 자의적 수탈이 일상화. 대다수 농민은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형편이었으며, 수취체제의 모순과 중압은 농민을 파산시키고 토지로부터 이탈시킴. 16세기 이후 사적지주제의 광범위한 전개를 배경으로 지주가의 전호나 노비로 대거 전락.

-양란 이후 늘어난 각급기관의 할거적 재정지배는 정규재정부문에서 벗어난 면세지면역자 양산, 국가경제의 커다란 부담을 낳음. 대동법과 균역법은 농민생활의 상대적 안정과 국가재정 건실성 제고에 일정하게 기여. 여기에 급격히 변질된 환곡을 더해 18세기 조선의 부세제도는 전정군정환곡 중심의 삼정체제로 운영. 이 시기 실시된 비총제는 지방재정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지방관청은 비공식 부문의 수취를 늘리는 형태로 대응. 이 과정에서 지방수령은 집중된 부세수취권으로 자체재정 확보에 열을 올렸고, 촌락민은 자구책을 강구하여 면리단위의 공동납 등으로 대응함.

-전정의 경우 전세대동삼수미결작 등에 더해 중앙과 지방 관청이 창출해 낸 각종 부가세가 조 100두를 상회. 군정은 각종 사모속과 집단적인 피역으로 타지역의 부담을 떠안는 상황. 갖가지 환곡은 농민의 생활기반을 뒤흔듦. 지방재정의 구조적 취약성에서 비롯된 부세운영상의 모순은 19세기 부세운영의 총체적 난맥상을 불러옴. 정약용에 따르면, 1결의 토지를 경작하는 8인가족의 연수입 600두에서 지주에게 지대로 납부하고 남은 300두 가운데 종자, , 식량 등을 제하면 실제 남는 것은 100두에 지나지 않고, 과중한 부세는 단순재생산조차 곤란한 농민들의 생활을 파산으로 몰아가곤 했음.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점진적 소득증대와 지위향상에도 불구하고 부세의 중압은 농민의 삶을 곤경에 빠뜨렸으며, 19세기 농민항쟁으로 이어짐.

 

맺음말

-첫째, 계급간 대립이나 국가의 수탈과 모순, 이에 대한 반발이라는 측면에서 벗어나야. 계급적 이해나 수탈만으로 해명하기 어려운 공적 구조와 운영의 원리 존재. 둘째, 부세제도의 촌락사회 관철과 민의 삶에 대한 규정력에 대한 연구. 셋째, 재정사에 대한 전향적 관심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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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국사 길잡이()(한국사연구회 편, 지식산업사, 2008)

 

농업생산력과 농업경영(김건태)

 

머리말

-농촌현장에서 작성된 고문서를 적극 활용한 연구에 따르면 조선 후기 농업의 발전 방향은 자본주의 맹아론이 모델로 삼았던 16~17세기 유럽 농업의 발전 방향과 상당히 달랐음. 이 시기 농업의 발전 방향은 토지소유 및 경영의 영세화, 집약적 농법의 발달 등으로 같은 시기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와 유사함.

 

1. 과전법과 농장

-16세기는 개간의 시대’. 전답의 소유자뿐만 아니라 경작자도 전답에 대한 권리 주장 가능. 16세까지만 해도 전답에 권리 주체가 1명 이상인 경우가 적지 않았음.

-농사지을 사람이 적고 땅은 많은 이 시기, 대토지 소유가 곧바로 많은 지대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음. 지배층과 지주는 수익극대화를 위해 토지제도와 신분제를 적극 활용함. 15세기의 그러한 토지제도가 과전법(科田法). 전국의 토지를 수조지로 설정한 다음 그 수조권을 정부의 각 기관과 전·현직 관료들에게 배분. 관료들에게 주어지는 토지(사전, 私田)는 경기도의 토지로 한정되어 등급에 따라 최고 150, 최하 10결을 지급. 여기서 관료들은 생산량의 10분의 1을 수취했고, 수취한 곡물의 15분의 1을 지세로 국가에 납부. 과전법 체제에서 사전은 전주(田主), 토지의 실소유자는 전객(佃客)으로, 전주가 더 중요하게 여겨짐. 수조권 세습은 원칙적으로 허락되지 않았음(수신전, 휼양전은 예외).

-과전법은 초기부터 문제가 발생함. 우선 사전이 부족했고, 전주가 규정보다 더 많은 곡물을 요구하며 전주와 전객 사이 분쟁이 발생. 1466년 사전의 지급대상을 현직관료로 한정하는 직전법(職田法) 시행. 성종대에는 관에서 전조를 수취하여 전주에게 지급하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 채택. 관수관급제의 도입은 지배층이 농민들의 잉여생산물을 직접 수취하는 것을 금지하는 의미. 이로 인해 전조가 국가재정에 충당되는 공전(公田)의 지세처럼, 전조가 관인에게 지급되는 사전의 지세도 국가에서 직접 수취하였으며, 관수관급제는 16세기 점차 사라짐.

-지주들은 자신들의 소유토지를 효율적으로 경영하기 위해 노비제를 적극 활용, 작인들의 토지 방매를 방지하기 위해 노비와 토지를 결합시킴. 이를 농장(農庄)이라고 일컬음. 16세기에는 개간이 활발히 진행되고 노비가 급증하면서 농장이 확대. 지주들의 농장경영 형태는 작개(作介), 가작(家作), 병작(竝作). 작개와 가작은 노비제의 의존했으며, 노비의 신역(身役)이었던 작개경작이 주된 위치를 차지함. 지주는 노비에게 작개와 함께 사경(私耕)을 나누어줬는데, 비율은 비슷했으나 대체로 논 중심의 작개지가 밭 중심의 사경지보다 훨씬 우수했음. 작개지 수확물은 거의 전량을 지주가, 사경지 수확물은 노비가 차지함. 가작은 주로 거주지 근처 농장에서 이루어졌으며 모든 농사과정을 지주가 직접 관리하는 형태. 병작은 지주와 작인(作人) 사이에 맺어진 계약에 따라 운영되었으며 수확물은 똑같이 나누어 가졌음. 15세기 작인들은 지주에게 신분적으로 예속되지 않은 농민들이었기에 농장에 비해 부차적.

 

2. 농법의 집약화와 작물의 다각화

-15세기에는 전국의 농경지 중 전라·경상·충청·경기도의 논밭이 60퍼센트를 차지. 논농사지대 역시 경기도와 하삼도에 편중되어 있었음. 논은 전체 농경지에서 20퍼센트에 불과했으나, 논농사가 훨씬 중요하게 여겨짐.

-15세기 벼는 두 가지 방법으로 재배함. 물을 채운 논에 미리 발아시킨 볍씨를 파종하는 직파법(直播法), 못자리에서 자라고 있는 모를 뽑아 전체 논에 옮겨 심는 이앙법(移秧法). 15세기 농민 대부분은 직파법을 선택했으며, 이앙법은 16세기 지주들에 의해 도입되어 후반기에 경상도 북부 지역에서,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경기와 삼남지방에서 보편화. 이앙법의 장점은 김매기 노동력의 절감, 단점은 이앙기에 가뭄이 들면 실농. 직파법의 장점은 가뭄에 강하고, 단점은 김매기가 어렵다는 것. 이앙법은 직파법에 견주어 대략 6~7할 정도의 김매기 노동력을 절감시킬 수 있었고, 벼 재배가 끝난 가을부터 이듬해 초여름까지 논을 밭으로 전환할 수 있었음. 이러한 장점으로 이앙법은 점차 퍼져나감.

-이앙법의 일반화는 밭농사에 큰 영향을 미쳤음. 콩과 조 밭의 김매기 시기와 논의 김매기 시기가 서로 겹쳤던 직파법의 문제를 이앙법은 해결할 수 있었음. , 이앙법의 도입으로 그루갈이와 섞어짓기도 확산. 밭작물의 파종방법도 변화했는데, 농종법(壟種法)에서 이랑보다 낮은 고랑에 종자를 뿌리는 견종법(畎種法)이 확산됨. 면화, 담배 등의 상품작물 재배 또한 확산.

 

3. 타작과 도지의 확산

-개간은 17세기까지도 지속되어 17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개간 가능 지역을 찾기 어려워짐. 토지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땅에 대한 권리도 점차 분명해져, 작인의 권리가 17세기 들어 더욱 빠르게 소멸(일물일권적 소유권의 성립). 이로 인한 분쟁이 급증(‘토지소송의 시대’). 일물일권적 소유권의 성립으로 지주는 병작을 활용해도 지대를 원활히 수취할 수 있었음. 16세기 후반부터 노비들의 태업으로 농장 경영의 어려움이 급증. 지주들은 17세기부터 작개를 병작으로 빠르게 전환시켜 나감.

-조선 후기 지주제의 근간이 된 병작은 지대수취 방식에 따라 타작(打作), 도지(賭只), 집조(執租)로 구분. 가장 오래된 타작은 수확이 끝난 뒤 지주와 작인이 곡물을 반분(정률지대). 도지는 봄철에 수취할 곡물량을 결정하고 수확 후 수취하는 방식(정액지대)으로 통상 타작과 비슷한 수준을 수취. 17세기에 출현한 도지는 작개를 닮은 점이 많음. 첫째, 도지가 적용된 답은 작인이 수확물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전답과 짝하고 있었음. 둘째, 논의 도지액은 상당히 높았음. 셋째, 도지가 적용된 전답의 수취가 원활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음. 한편, 19세기에 발생한 도지는 수확이 임박한 시점에 작황 수준을 살펴본 다음 현장에서 지대량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도지와 타작의 중간형태.

 

4. 토지소유와 농업경영의 영세균등화

-토지와 달리 농촌인구는 18세기 들어서도 꾸준히 증가, 토지 증가율보다 농촌인구 증가율이 높았기 때문에 조선 후기 농민들의 평균 농지소유 규모와 대규모 토지 소유는 줄어듦(경자양안의 사례). 이는 인구 증가와 함께 토지의 분할상속이 지속되었기 때문. 양반지주들은 재산규모 영세화를 막기 위해 장자에게 토지를 집중하고 더 많은 전답을 제위전으로 할당하여 종손과 문중이 관리하게 함(‘종가형 지주’). 장자가 아닌 양반의 토지소유 규모는 더욱 영세화. 조선 후기 대토지 소유자는 고관을 역임한 관료적 지주였으나, 후손들이 관직 진출에 실패하고 분할상속에 따라 유지되지 못함.

-조선 후기에는 개별 농민의 경작면적 또한 차츰 축소. 지주들은 가능한 많은 작인들에게 땅을 빌려주어 안정성을 높이고자 함. 이에 하향평준화한 농민이 양산. 이는 농법의 변화추세와 함께 진행되었는데, 이앙법 보급 이후 농법이 점점 집약화되었으나 단위 농가의 노동력은 그 이전 수준에서 유지되고 경작면적이 차츰 축소되었던 것.

 

맺음말

-조선시대 농업생산력 변화는 16세기부터, 농업경영의 변화는 17세기 중반 이후부터라는 게 중론. 조선 후기 토지소유규모와 경영규모의 추이가 동시기 서유럽과 달리 영세균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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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실학이란 무엇인가

 

실학연구의 어제와 오늘(한영우)

 

1930년대 민족주의 국학자들이 본 실학

-역사상 실학을 학술용어로 쓰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민족주의 국학자들. 1934년 다산 정약용 서거 99주년을 맞아 정인보, 문일평, 안재홍 등이 다산의 학문을 정리하고, 이른바 조선학운동을 개시. 안재홍에 의해 개념화된 조선학민족적이면서도 국제적인 성격으로전통문화를 이해하려는 것으로, ‘고유성보편성을 동시에 인식하려는 태도. ‘국제성혹은 보편성민주주의를 의식하고 쓴 것으로 계급통합적 신민주주의를 의미.

-‘조선학의 시각에서 바라본 실학은 자연히 민족적이고 민중적(민주적)’으로 이해될 수 있었고, ‘현실적인 성격도 가질 수 있었음. 예를 들어 안재홍은 정약용을 프랑스 루소에 비유하고, 그의 여전론과 전론(田論)에 피력된 토지제도를 국가사회민주주의적 토지제도로 이해하면서 이를 해방 후 조선국민당의 정강정책으로 수용하려 함. 그런데 조선학관점에서의 실학은 정약용이라는 특정 인물을 중심에 두고 설정. 이는 정약용이 진보적 성향이 강한 데도 원인이 있지만 정인보, 안재홍, 문일평 등의 출신배경이 비주류였던 탓도 있음. 자연히 조선후기 사상계의 주류인 노론은 물론, 소론, 남인에 대한 연구도 거의 없었으며, 조선후기 역사에 대한 관점도 정립되어 있지 않았음.
-일본 학계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음. 일본은 주자학이 전래되면서부터 실학이 대두하여 17~18세기 고학을 거쳐, 근대에 와서는 후쿠자와 유키치에 이르기까지 실학의 전통이 이어짐.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 주자학을 비판하며 등장한 고학파는 실학파로 불리기도 함. 한편, 일제시대 법제사가인 아사미 린타로는 1922년 저서 조선법제사고에서 다산 정약용을 실학자로 부르며 높이 평가. 한국 조선학학자들의 직접적 언급은 없으나 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부정하기 어려움. 그런데 아사미는 한국사가 세계사와 고립되어 문물이 매우 낙후되어 있다고 평가. 그는 정약용을 반도의 행복이라고 했는데 그 배경에는 한국사를 비참한 역사로 보는 전형적 식민사관이 바탕에 깔려 있었음.

-1930년대 정약용을 중심으로 실학을 탄생시킨 배경은 시대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음. 즉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의 현실적 요구와 동시에 식민사관에 젖은 일본학계의 영향이 동시에 작용. 양자 모두 조선시대를 비참하게 보았기에 공존이 가능했음. 결국 이 시기 학자들은 조선시대 사상계 전반에 대한 신뢰가 없고, 실증적 연구가 극히 부족한 상태에서 특정 인물 하나를 돌출시켜 성급히 개념화. 결과적으로 실학의 대칭은 주자학이 되면서 주자학을 반민족적, 반민중적, 비실용적인 학풍으로 평가.

 

1950년대 천관우의 실학개념

-해방 후 천관우, 홍이섭 등에 의해 1930년대 실학연구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짐. 천관우는 1952년 학부졸업논문 반계유형원연구에서 실학의 개념을 새롭게 정리. 그는 실학을 실정(實正), 실증, 실용을 특징으로 하는 조선후기 신학풍으로 정의. 17세기 한백겸, 이수광, 김육, 권문해 등이 그 선구자이며 그 뒤를 이어 유형원, 이익, 안정복, 박세당, 이중환, 신경준, 서명응 등이 나와 실학의 맹아가 싹트고, 19세기 북학파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성해응, 정약용, 김정희, 이규경, 최한기에 이르러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봄.

-천관우의 실학연구는 실학의 시기를 조선후기 300년으로 확장시키고, 당파상으로 남인, 소론, 일부 노론(북학파)을 망라하며, 1세기의 준비, 1세기의 맹아, 1세기의 전성으로 실학의 흥망성쇠를 정립시켰다는 것이 특징. 그의 실학 개념은 시간과 공간을 조선후기 전 시기로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진일보했으며, 유형원의 사상을 현대 역사학의 실증적 방법을 통해 분석했다는 점에서 의의. 그리고 실정, 실용에 실증을 실학의 특징으로 추가한 것도 주목됨. 이러한 실학의 사상사적 특성은 한마디로 봉건에서 근대로의 과도기적 사상. 실학과 반대되는 사상은 주자학으로 설정. 이상의 천관우의 실학접근은 봉건근대라는 대칭구도 속에서 파악한 것이 특징인데, 문제는 이러한 양극적 대칭구도가 역사적 진실성을 지니고 있는가. 조선시대가 봉건사회라는 대전제가 증명되지 않는 한 위와 같은 접근은 가설일 뿐. 한편 실학이라는 용어가 실제로 소위 실학자라고 규정하는 인물 사이에서만 사용되었느냐도 실증적으로 증명된 바 없음. 1970년대 천관우는 한우근의 비판에 대한 대응 취지로 조선후기 실학의 개념재론한국실학사상사를 발표. 재론에서 그가 밝힌 실학의 개념은 한마디로 실학을 민족 지향(자주), 근대 지향(진보)’로 보아야 한다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님.

-홍이섭은 천관우가 정의한 실학개념을 바탕에 깔고 정약용 연구에 일가를 이룸. 그는 박사논문이기도 한 정약용의 정치경제사상연구(1959)에서 봉건적인 것에서 근대적인 것으로의 이행과정 속에서 정약용의 사상을 자리매김함. 여기서 주자학은 봉건적 사유, 실학은 주자학에서 벗어나려는 사상으로 이해됨. 홍이섭의 정약용 연구는 아사미 린타로의 영향을 받기도 함.

-실학을 근대사상의 맹아로 보려는 천관우의 실학개념은 조선후기에서 자본주의를 비롯한 자생적 근대화의 맹아를 찾으려는 후배 역사학자들의 광범한 호응을 얻어 지금까지 통설의 지위를 누려오고 있음.

 

1958년 한우근의 실학개념

-1950년대 후반 한우근은 천관우의 실학개념에 전반적 의문을 품음. 그는 1958년 발표한 이조 실학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실학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버리고 실제 기록을 통해 실학 개념에 접근. 조선왕조실록, 문집을 통해 확인된 실학은 조선후기의 고유용어가 아니라 고려말 이후 조선시대에 걸쳐 주자학 혹은 정주학을 가리키는 용어였으며, 중국에서도 삼대의 학문과 정주학이 실학으로 불렸음을 실증적으로 논증. 주자학이 실학으로 불린 이유는 사장학으로 빠진 고려시대 유학이 아니라, 유학 본래의 정신인 수기치인을 실천하는 주자학이 진정한 유학이기 때문. 한우근의 연구는 기존의 실학개념에 대한 정반대의 결론을 내린 것으로, 실학과 주자학을 대칭개념으로 보아온 연구경향을 의미를 잃게 됨. 한우근은 조선후기 주자학을 비판한 학자나 학문을 경세치용의 학이라는 말로 대신할 것을 제안하고, 그 대표적 학자로 성호 이익을 연구.

-한우근의 실학해석은 실학이라는 용어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밝히려 했고, 주자학도 실학의 범주에 넣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사상사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음. 그동안 비판적으로 평가된 주자학 연구를 촉발시키기도 함. 그러나 한우근의 실학개념 연구는 그 용어 실체를 찾아내는 데는 공헌했으나, 주자학 혹은 실학의 사상사적 내용과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진 못함. 수기치인, 경세치용 등의 용어는 초시대적이고 추상적인 용어로 특정시대 사상을 해석하는 용어가 되긴 어려움. , 조선시대 유학의 주류는 자신의 학문을 주자학 혹은 정주학보다는 성리학으로 보편적으로 지칭했다는 문제가 있음.

 

1970년대 이우성의 실학개념

-천관우와 한우근의 실학개념이 대립되는 가운데 조선후기 사상을 실학으로 불러야 한다는 입장에서 실학 개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틀을 제시하고 나선 것은 1970년대의 이우성. 그는 1973년에 발표한 실학연구서설에서 실학을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세 분야로 나눌 것을 제안. 경세치용은 제도개혁을 주장한 유형원, 이익 등 초기 실학자들의 학풍을, 이용후생은 과학과 기술, 상업의 중요성을 주창한 18세기 후반 북학파의 사상을, 실사구시는 청대 고증학을 수용한 김정희 등 19세기 이후의 실학을 가리킴.

-이우성의 실학개념은 실학의 성격이 하나가 아니고 시기에 따라 그 성격이 변해간다는 것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음. 그러나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라는 용어의 모호성이 문제. 세 용어는 뉘앙스의 차이는 있지만 얼마든지 중복되고 상통될 수 있는 용어. 또 초역사적이고 추상적 개념이라는 것도 문제. 경세치용에서 이용후생을 거쳐 실사구시로 변해간 것이 사상의 발전에서 어떤 의미인지 밝히지 못함.

 

1980년대 지두환의 실학 개념

-1970년대 이후 실학에 대한 관심이 냉각됨. 첫째, 박정희 정부의 반민주적이고 폭압적 근대화정책에 대한 반발로 근대지향적 사상으로 평가된 실학에 대한 관심이 떨어짐. 둘째, 조선후기 사상사연구가 마음에 맞는 실학자들을 찾아내는 투망식(投網式) 접근을 벗어나며 조선시대 사상계의 주류인 성리학에 대한 전반적 연구가 진행됨. 한편, 1970년대 이후로 주자학이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도 주목할 일. 조선시대 학자들이 주자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일이 거의 없고, 성리학, 이학, 정학, 성학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함. 또한 성리학 연구가 심화되면서 성리학의 긍정적이고 진보적 요소들이 밝혀지게 되었으며, 그동안 실학자로 추앙된 인물들의 사상과 근본적 차이가 없다는 것도 확인됨.

-조선시대 사상사 연구 성과에 따라 실학 개념도 자연히 재론됨. 지두환이 1987년 발표한 조선후기 실학연구의 문제점과 그 방향은 새로운 연구경향을 반영함. 그의 실학개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종전의 실학 개념과 다름. 첫째, 조선시대에 실제 사용된 실학이라는 용어는 과거시험에서 강경(講經)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문장으로 답을 적는 사장(詞章)과 대비되는 것. 둘째, 북학이 근대지향적이고 북학만이 진정한 실학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함. 그 이유로 다섯 가지를 들었음. 첫째, 철학적으로 성()을 이()로 보는 성리학을 극복. 둘째, 성리학의 화이론과 정통론을 탈피. 셋째, 농업중심 산업구조와 신분제를 바탕으로 한 지주-전호관계를 인정하는 성리학에서 탈피하여 농상공업의 균형적 산업구조를 바탕으로 경제적 지주-소작관계만을 인정함. 넷째, 고증을 소홀히 한 성리학과 달리 북학은 청조고증학을 도입하여 철저한 전거주의를 지향. 다섯째, 성리학이념을 탈피하는 소설을 씀.

-지두환의 실학 개념은 근대 지향에 기준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선배학자들의 실학 개념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음. 그는 북학 이전의 주자성리학이나 17~18세기 조선성리학을 중세적인 사상으로 규정. 그럼에도 진일보한 측면은 17~18세기에 대한 연구성과를 수용하여 조선시대 사상사를 조선전기의 주자성리학 17, 18세기의 조선성리학 18세기 말 이후의 북학으로 시대구분한 것. 그러나 2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는 지두환의 실학 개념도 문제가 있으며,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실학 개념을 재정립할 단계에 와 있음.

 

대안1: 실용적 성리학이 실학

-조선 후기에는 국가를 경영하고 국리민복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 학문을 실학으로 보는 단계로 발전. , 수기치인의 원론이 아니라 그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는 학문을 곧 실학으로 부르는 용례가 발견됨. 17세기 이수광(실효, 실득, 실덕, 실심, 실공, 실정을 강조), 18세기 안정복(형이하의 학문, 즉 인생일용지사를 실학이라고 정의), 영조의 유형원 실학 평가, 정조(경세실용지학, 실심실학, 실공, 실덕, 실지사공, 실용 등의 용어 사용)의 사례 등이 있음. 이상과 같이 실용적인 학문, 즉 학문과 사공(事功)이 일치하는 학문을 실학으로 불렀던 것을 알 수 있음.

 

대안2: 교조적 주자학은 과연 있었는가

-우리나라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주자학이 전폭적으로 교조적으로 수용된 시대는 없다고 보아야 하며, 어느 시대이든 조선성리학으로 보는 것이 옳음. 조선 초기에는 원대와 명대를 거쳐 관학화된 주자성리학을 수용하여, 특히 권력구조와 관련된 일부를 받아들임. 16세기 사림의 등장으로 주자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것은 사실이나, 이전의 국가체제를 비판하고 향촌자치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일부를 수용했을 뿐. 서경덕, 조식이 독자적 기철학을 발전시켜 뒤에 북인으로 결집된 것도 특징. 17~18세기에도 율곡 이후의 조선성리학이 주류였다는 주장은 서인 위주로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며, 이 시기 주자성리학과 구별되는 육경고학, 주자의 경전주석에 대한 비판이 유행. 17~18세기 사상계는 하나의 흐름으로 보기 어려운데, 병자호란과 명의 멸망을 기점으로 사상계의 동향이 매우 다르기 때문. 호란 이후 주자의 반청정서가 큰 호소력을 가지고 주자학에 대한 경도가 상대적으로 가장 크긴 했으나, 주자를 비판한 윤휴, 박세당 등의 사례에서 보듯이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조류도 존재.

-16세기 말~17세기 전반기 임진왜란이라는 대규모 국제전쟁을 경험하면서 국가경영방식이 달라지고, 명으로부터 새로운 사조의 유입으로 사상계 전반의 변화가 발생. 왕양명과 육구연의 심학, 북송 학자 소옹의 역학, 명나라 이반룡, 왕세정 등의 고문사, 서양 선교사들이 가져온 서양의 과학과 기술, 서학 등이 영향을 줌. 왜란 전후의 사상계는 주자성리학이나 조선성리학보다는 오히려 육경고학이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보는 게 사실에 가까움.

 

대안3: 서울 지역의 육경고학이 실학의 선구

-물론 성리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으나, 육경고학은 주자성리학과는 여러 측면에서 다름. 첫째, 육경고학은 우선 소의경서(所依經書)에서 사서삼경을 뛰어넘어 육경(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 주례)의 세계로 들어가고, 주자의 주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경전해석을 추구. 둘째, 양명학, 노장사상, 단학, 선불교, 제자백가, 천문, 지리, 의약, 복서 등 잡학, 천주교, 법가 등에 대해서도 이단으로 배척하지 않고 심학의 차원에서 너그럽게 포용. 셋째, 도덕적 관점에서 우주를 바라보는 주자학과 달리 북송대 학자 소옹의 물아일체론, 물아평등론, 이물관물론에 주목하여 만물을 인간과 평등하게 바라보는 우주관을 열어놓기도 함. 넷째, 문학에서도 송대의 문장과 시에 비판적이었으며, 문장은 진한 이전의 고문을, 시에서는 성당(盛唐)의 시를 최고로 꼽음(당시의 성행). 다섯째, 정치관에서 황극탕평론과 군사론을 바탕으로 한 왕권강화를 추구하고, 왕도와 패도, 의리와 공리, 인정과 형벌의 조화를 추구. 예학에서도 군례와 신례를 차별하여 예송논쟁으로 이어지게 된 것.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 군사론도 이들의 주장이 수용된 것. 여섯째, 부국강병을 지향하여 국가가 적극 개입하는 상공업과 화폐경제에 대한 관심도 높았으며, 토지제도에서는 정전제에서 새로운 모델을 찾으려 했음. 마지막으로 역사도 도덕적 관점에서만 접근하지 않고 물질적, 제도적 기반에서 이해하려고 노력.

-육경고학자의 대표자는 한백겸과 이수광이었으나, 서울의 이른바 침류대학사(枕流臺學士)들 가운데에서도 유사한 학문경향을 받은 이들이 존재했음. 육경고학은 윤휴, 허목, 이익, 정약용 등을 통해 경기남인의 학풍으로 이어졌으며, 정조도 이를 높이 평가하고 왕권강화론을 수용. 한편, 육경고학은 남인에게만 수용된 것은 아니며 17세기 말~18세기 서울의 예단(藝壇)을 이끌어간 노론계 김창협, 김창흡 형제나 이들과 관련이 있는 소위 진경문화도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 없음. 또한 18세기 호락논쟁에서 서울 낙파의 인물성동론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짐작되며, 북학의 이용후생론, 명물도수학도 무관하다고 볼 수 없음. 이와 같이 왜란 전후로 서울과 근기지방에서 일어난 육경고학의 전통은 18세기 말까지 지속됨. 여기서 당파적 친화성보다 지역적 근접성이 더 큰 요인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음. 끝으로 일본에서도 17세기 중반 이후 주자학을 비판한 고학(古學)이 대두했음을 유념해야 함.

 

대안4: ‘중세근대의 이분법 극복

-조선시대를 중세근대의 이분법으로 접근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음. 먼저 그 개념 정의가 명확하지 않은데, 중세를 봉건사회로 근대를 자본주의사회로 본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는 것을 의미. 그러면 조선시대를 봉건사회와 자본주의사회라는 구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타당한가. 정치적 중앙집권의 확립, 관료제도의 운영,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제도, 시험에 의한 능력주의 관리등용제도 등에서 조선이 서양식 봉건사회와 같다고 볼 수 없음. 그 외 막스 베버의 녹봉제적 봉건사회’, 북한의 토지사유권이 국가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는 주장, 영세농의 존재를 농노로 보는 주장, 신분제 미극복을 봉건사회로 보는 주장 등을 수용할 수도 없음.

-조선 후기를 근대자본주의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없음. 자유상업, 자유수공업의 발전, 상품화폐경제의 성장, 국역노동을 대체하는 고임제도(雇賃制度)의 확대 등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식민지 개척과 자본 축적, 산업혁명, 시민혁명 등은 존재하지 않았음. 조선 후기 사상에서도 자본주의사회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실현하려는 사상은 없었음. 조선후기 지성사의 기본 흐름은 현실적으로 부국강병을 추구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유교적 이상주의에 입각한 대동사회를 지향.

-, 조선후기는 서양의 봉건사회보다 한층 진보적인 사회이나, 서양의 근대사회보다는 산업구조가 한층 뒤떨어진 사회. 사상적으로도 서양의 근대사상과는 달리 개인과 공동체가 조화된 도덕적 자기완성을 추구. 아직 우리는 이상과 같은 특성을 지닌 우리 역사의 발전과정을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만들지 못함.

-유교적 이상주의가 최고의 수준에 이른 조선후기를 근세적 유교사회라는 독자의 용어로 개념화하기를 제안. 조선후기 300년은 유교적 이상주의를 바탕으로 근세 유교국가의 중흥을 이룩한 시대이며, 19세기 후반 이후 서양과 만나며 법고창신의 한국적 근대로 나아가는 이행기로 이해할 수 있음. 1897년 대한제국은 바로 전통과 서구가 조화된 한국적 근대국가로 볼 수 있음.

 

대안5: 실학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왜란 전후 주자성리학을 비판한 육경고학은 실학으로 부를 수 있으며, 그 대칭관계에 있었던 주자성리학을 실학으로 명명하기는 어려움. 18세기 후반 북학은 육경고학의 연장선상에서 발전한 것으로 실학으로 인정할 수 있으며, 북학에 반대하는 학풍은 실학의 범주에서 제외해야 함. 19세기 전후 북학은 청조 고증학을 수용하여 학문의 실증성, 전문성, 과학성을 강화시킴. 다만 학문의 실천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으며 학문과 정치의 독립적 분화가 이루어짐.

-, 왜란 전후부터 시대를 앞서가는 학문이 꾸준히 이어져 18세기 중흥을 이끌어내고, 그 이후 보완되며 개화사상으로 연결됨. 육경고학과 북학이 바로 그것이며 이를 실학으로 부를 수 있음.

 

대안6: 미래의 신실학

-‘근대 지향에 매달릴 필요 없이 탈근대에 필요한 생명과 평화의 관점에서 실학을 바라볼 필요가 있음.

다시 실학이란 무엇인가

17세기 실학의 형성과 그 정치사상(정호훈)

 

-조선을 지배했던 사상이 주자학이라 할 때, 근대성의 성취 정도는 주자학을 벗어나 새로운 사유를 세우는 것과 맞물려 있음. 주목할 점은 조선 당대의 국가 체제와 질서를 뛰어넘어 새로운 국가를 구상하려는 일련의 움직임. 그것은 17세기 중반 유형원(반계수록)에서 시작되어 19세기 전반 정약용(경세유표)으로 연이어 출현했는데, 경국대전에 구체화된 조선의 사회구성과는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새로운 체제를 제시. 주자학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상태에서 그 정치론, 사회운영론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유를 발전시켜 새로운 국가상을 제시.

-이 글에서는 17세기 유형원 반계수록의 새로운 국가 구상이 사상사적으로 이루어지는 양상을 중심으로 형성기 실학의 특성을 살핌. 유형원은 이른바 북인계 남인으로, 그의 사유의 바탕에는 북인과 북인계 남인의 학문 전통이 존재하며 반계수록은 개인의 집필을 넘어서는 학파적 전통의 산물. 16세기 후반~17세기 초 활동했던 초창기 북인계 남인(한백겸, 이수광)의 학문을 살펴 반계수록의 전 단계 사고를 해명하고, 다음으로 윤휴와 유형원의 생각을 정리. 이 작업은 조선후기 실학의 특성을 당쟁이 격화되고 양란이 일어나는 격동의 17세기 상황 속에서 풀어가려는 노력의 일환.

 

한백겸·이수광의 학문과 실학적 사유

-조선 개국 이래 사상사는 주자학적 사유의 확대와 연관. 16세기 말에 이르면 주자학을 준거로 한 학술·문화 활동과 정치·사회 운영이 대세로 자리 잡음. 주자학 외의 사상들도 유입되어 서경덕, 조식 등은 적극 수용. 주자학의 중시 정도는 특정 사상에 대한 호·불호 이상으로 사회정치적 인식과 직접 연관되었으며, 학파의 분화가 당파의 분화로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주도권의 문제와도 관련됨. 1589년 기축옥사, 1623년 인조 반정은 주자학적 사유를 중시하는 세력과 주자학을 상대화한 세력 간의 일대 격전의 의미. 그 결과 이황학파, 이이학파 등 주자학을 중시하는 세력이 성장하고 서경덕·조식계의 북인 학통의 위축과 약화를 불러옴.

-이 같은 상황에서 일각에서 정치적 생명을 유지하며 주자학과 다른 새로운 사유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한백겸과 이수광. 이들은 북인과 남인의 정치·학문상의 영향을 고르게 받았으며, 고대적 사실을 재해석하고 외래의 신사조·신문물을 적극 수용하며 새로운 사유의 틀을 형성. 한백겸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기전설(箕田說),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이 그 산물.

-한백겸의 글 중 기전설은 당대 정치사상 영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 이 글은 기자의 정전이라고 전해오던 평양의 유적을 답사하여 실측한 후, 이것이 은나라의 토지제도이며 맹자의 은의 조법(助法)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해석하며 작성한 글. 그는 은·주의 토지제도를 새롭게 해석하며, 기전은 은나라의 토지제도를 원용하였으며 주대의 정전제에 앞서 시행된 제도라는 점, 은대의 토지제도에 대한 주희의 해석이 잘못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맹자의 정전제설에 대한 그의 의심 또한 근거가 약하다는 점, 기전에서 보듯 고대 조선에서 삼대의 토지분급제가 시행되었던 사실 등을 확인. 그의 작업은 기자의 실체에 접근함과 동시에 고대 이상 사회의 실현에는 성인의 법제를 시행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조선학계에 천명. 그의 견해는 뒷 시기에도 큰 관심을 받았으며 특히 윤휴, 유형원은 토지개혁론에서 기전설을 활용.

-이수광의 학문은 지봉유설에 집약되어 있는데, 이는 서울·경기 지역 학인들의 학문성과. 지봉유설은 천문, 지리, 인사, 경서, 문장의 다섯 부류로 체계를 잡고 2582항목에 걸쳐 천··인 세계의 만사 만물을 견문한대로 수록. 천주실의, 곤여만국지도(坤輿萬國地圖), 영국,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 서양의 종교와 국가, 과학 기술 등 중국에 소개되었던 서양 관련 지식을 거침없이 소개. 이수광은 참된 유자, 참된 선비란 천··인의 세계에 두루 통할 때 이루어진다고 하여, 인식과 사유의 대상을 천지와 고금, 만사 만물로 설정하고 그 모든 존재를 두루 탐구하고자 함. 이는 그의 인식론과 연관된 것으로, 지식의 습득·확대와 덕성의 완성은 별개의 사항임을 전제로, 주자학과 달리 지식은 지식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음. 절대의리·명분의 획득과 객관 세계에 대한 실제적인 지식의 탐구를 분리하는 이 같은 인식론은 사천학(事天學)적인 세계관을 근거로 함. 이수광은 상제의 존재를 긍정하고 인간과 천과의 통교를 종교, 신앙의 차원에서 긍정.

-이와 같이 한백겸, 이수광은 주자학과 다른 견지에서 세계와 인간을 파악하고 이해하려 노력. 이들을 통해 고제 ·고법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었으며, 유연하고 폭넓게 현실을 이해하려는 지향이 본격적인 틀을 갖추기 시작함. 한편, 이들의 정치적 사고는 대체로 국가 혹은 군주의 역할을 크게 강조.

 

실학적 사유의 확대와 새로운 국가구상

 

윤휴와 유형원의 고학(古學) 체계와 국가 의식

-초창기 실학적 사유는 다음 세대에 이르면 김세렴, 김신국, 이원진, 이하진, 이성구, 이민구, 허목, 윤휴, 유형원 등으로 연결되며 확장. 이들은 서울·경기 지역에 거주하며 활동했던 이른바 북인계 남인. 이들이 활동했던 시기는 인조~숙종 초로,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을 거친 뒤 북벌 논의와 예송이 격화되고, 남인과 서인의 갈등이 첨예해지는 상황이었음. 이들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기호학계의 주자학 절대주의와 대립각을 이룸.

-윤휴와 유형원은 이수광, 한백겸의 생각을 적극 수용하여 고대의 사상, 법제를 연구하고 새로운 법제를 구상하였는데, 그런 면에서 이들의 학문을 고학으로 지칭할 수 있음. 이들의 고학은 두 가지 방식으로 드러남. 하나는 주자학적 사유를 벗어나 천인상관(天人相關)-천인감응(天人相感)의 사천학적인 사유 속에서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 가려는 윤휴의 방식. 윤휴는 고대 유학이 사천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파악, 주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여러 경서를 이해함. 또 하나는 고대적 사유에 성리학적 사유 틀을 활용하여 사회 변화 이념을 만들어내려는 유형원의 방식. 그는 여러 경전에서 제시하는 삼대 사회의 이념과 법제를 근거로 반계수록을 구성함. 더불어 천리와 인욕의 개념을 빌려 삼대와 삼대 이후의 법제를 구분하고 반계수록의 정당성을 강조.

 

삼대의 법은 모두 천리(天理)를 제도화한 것이고 후세의 법은 모두 인욕(人欲)을 제도로 만든 것이다. 인욕의 제도를 시행하면서 국가가 제대로 다스려질 것을 바란다면 천하에 어찌 이럴 리가 있겠는가?

 

-유형원은 천리를 갖춘 법제를 실행해야 하며 인욕에 바탕한 후세의 제도를 폐기, 삼대의 법제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 물론 그 고제를 원형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그 원리와 구조를 법제상에 반영하여 현실화해야 한다는 것. 주자학에서의 핵심 개념인 천리인욕설을 빌려 법제의 가치와 의의를 설정. 이처럼 이들은 고학에 관심을 기울이며 고대 사회의 법제 속에서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함.

-이들은 개성이 뚜렷한 정치론을 구축함. 먼저 사회의 운영에 예 혹은 예법과 같은 외재 규범의 시행을 중시함. 이들은 국가·사회의 도덕 실현이 주자학의 심성론적인 방법과 달리 국가의 법제, 예제에 의해 조건 지워짐을 강조. 다음으로 이들은 국가의 민간 영역에 대한 적극적 개입과 역할을 강조. 윤휴는 효경해석을 통해 효치론(孝治論)을 제시. 효치론은 군주와 민을 군과 신민의 관계이며 부모와 자식 관계로 유비. 군주와 민의 정치적 관계는 의제 혈연관계로 군주는 국가라는 의 가부장이며, 민은 그 의 자식으로 절대적 친민성·접착성을 지닌다고 이해. 이로써 국가의 공적 질서에서 요구되는 규범과 사가의 사적인 질서에서 실현되는 규범을 일체화, 충과 효 사이의 충돌을 해소하고 충의 영역을 확장. 효치론은 군권의 일원적 지배를 강화할 수 있는 근거였음. 한편, 유형원은 주례적(周禮的) 국가체제건설 구상을 통해 토지와 인민, 자연에 대한 관리를 국가적으로 기획하고 중앙집권 제도 속에서 실현하자고 주장. 반계수록에서 제시된 여러 구상은 주례의 방식을 원용한 것.

-이와 같이 윤휴, 유형원은 삼대의 고제와 고법, 삼대의 사상을 탐구하며 국가의 기획과 관리 기능을 최대화하여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이상 사회를 구상. 이는 국가공동체의 성격을 강화하는 가운데 윤리규범, 사회이념을 재구성하며, 사적인 영역을 축소하고 공적인 관계망 속에서 사회구조를 재배치할 것을 지향한 것.

 

부국강병 체제의 구상과 사회재편 방안

-국가의 기능을 강화하여 사회 질서를 재구성하고자 했던 윤휴·유형원의 지향은 17세기 중엽의 조선 현실이 갖는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식 위에서 구축된 것. , 양란 이후 내수(內修)와 외양(外攘)의 양 측면으로 닥쳐온 거센 압박을 헤쳐 나갈 방도를 찾기 위해 대경장의 변화를 주장. 17세기 내내 조선사회를 규율하는 근본적 문제는 내수와 외양의 과제를 성과 있게 성취하여 국가의 기능을 정상화하는 일이었고, 지식인들은 이에 대해 나름의 방책을 고민. 여기서 윤휴와 유형원은 대경장, 대변혁이 필요하다고 파악한 것.

 

. 만약 옛것만 지키면서 변통할 줄 모르거나 폐단을 그대로 두고 개혁할 줄을 모르면 아무리 왼편에 순·우가 있고 오른편에 고요(皐陶)가 있어도 나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 크게 무언가 해낼 임금이면 반드시 크게 경장하는 법이고 만세의 공을 세울 자는 반드시 일대의 의심스러운 일을 털어버리는 법입니다.

 

. 생각하건대 왕도가 무너지고 막히면서 만사가 기강을 잃었다. 처음에는 사의(私意)로 법제를 만들기 시작하다가 마침내는 융적(戎狄)이 중국을 어지럽히는 데 이르렀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고루하고 변통하지 못한 것이 많음으로 말미암아 쇠퇴에 쇠퇴를 거듭한 결과 졸지에는 커다란 치욕까지 당했다. 천하 국가가 대개 여기에 이르렀는데도 폐법(弊法)을 변혁하지 않으면 정치를 돌이킬 길이 없게 된다.

 

-이들은 이러한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서 부국강병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근본이 된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조선의 사회구조를 변혁하는 것. 물론 현실에 적용하는 방식에서는 두 사람이 달랐는데, 윤휴는 정전제를 비롯한 삼대의 법제 실현을 꿈꾸면서도 현실 정치질서를 그대로 용인하며 현실 가능한 법제를 실시하려 한 반면, 유형원은 경국대전체제의 전면적 개조를 구상. 윤휴는 국가의 민에 대한 전면적 파악·장악, 국가의 민에 대한 경제적 재생산 기반 구축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음. 그는 평부균역(平賦均役)’의 실현과 국가의 민에 대한 제일적(齊一的) 일원적 장악을 표방하며 면리제 정비, 오가작통법, 지폐법, 호포법 시행을 주장.

-유형원은 반계수록을 통해 사회 전 구조에 걸친 구체적·체계적 국가 개혁 구상을 제시. 공전제(公田制) 시행, 중앙집권제 강화, 과거제 혁파와 공거법(貢擧法) 시행, 노비제 폐지, 사농공상의 사민 제도 재정비, 상업과 수공업의 국가적 관리체계 강화 등. 유형원의 개혁국가 구상에서 핵심은 공전제로, 그는 토지제가 모든 제도를 규정하므로 토지제를 바로잡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 지주전호제에 기초한 토지제도를 혁파하고, 대부·사로부터 농민과 상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 신분에 맞추어 토지를 재분배 받도록 구상하였으며, 병농일치 원칙에 따라 공전제와 연계한 병역을 운용할 것을 계획. 상업과 수공업은 공전제와 연관하여 국가가 운영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는 제반 이익은 국가가 적극 수렴·관장한다는 이권재상(利權在上)’ 이념과 연관됨. 한편, 유형원은 명분에 따른 차등은 정당화하였으나, ‘노비도 국민이라는 관념으로 노비제를 부정. 또한 지방제도는 군현제와 봉건제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기존 군현을 재편하되, 향리제(鄕里制)를 기본 조직으로 할 것을 구상. 이처럼 반계수록에 제시된 국가는 당대 조선을 전면적으로 재구성하여 병농일치가 실현되며 전 산업과 인민의 생활에 국가적 관리와 조절이 이루어지는 구조를 갖춤. 국유·공유의 경제활동을 중심으로 사적인 경제활동은 엄격한 제한이 취해졌으며, 사회구성원은 신분과 직역을 엄격히 유지하며 국가가 규정한 공적인 질서·규범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 해야 했음.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이르러 조선의 사상계는 질적으로 새로운 사유와 지향을 확보. 토지와 인간에 대한 사적 소유를 근거로 한 사회경제적 제반 관계를 철폐하여, 국가를 매개로 한 토지지배와 사회관계의 재구성이 반드시 실현해야 할 가치로 천명됨. 그러한 사회는 조선의 체제를 넘어선 것으로, 역사적 맥락에서 매우 전진적인 것. 조선후기 실학의 특성을 주자학을 얼마나 초과하는가를 중심으로 살핀다면, 유형원의 반계수록은 그 특성을 전형적으로 보여줌. 이는 18, 19세기 새로운 국가론을 내포한 실학을 예비하는 디딤돌이 되었음.

 

맺음말

-윤휴와 유형원은 법·제도, 예법을 바탕으로 천리의 도덕성이 실현되는 사회에 대한 구상을 구체화하였으며, 국가가 가진 힘을 공의(公義)로 규정하며 국가 질서의 재편을 주장. 주목할 점은 국가의 힘을 강화하고 이를 여러 변화의 추동력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점. 그 새로운 국가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부국강병을 실현하며, 한편으로는 토지제와 신분제를 둘러싼 인간관계의 대변화가 일어나는 사회였음. 이로부터 직접적으로 근대적 요소를 도출해내는 것은 무리겠으나, 18, 19세기의 새로운 사상과 문화에 중요한 촉매가 됨. 특히 남인 이익, 정약용은 큰 영향을 받음. 18, 19세기 실학적 사유 속에서 17세기 실학 사유의 의미를 짚어야 그 의의를 밝힐 수 있음.

개화파 열전(신동준, 푸른역사, 2009)

-당초 민씨 가문이 조선 최고의 세도가로 비상케된 것은 민영환의 고모가 대원군에게 시집을 간 데서 비롯되었다. 민씨 척족세력은 이후 잇달아 고종과 순종의 비를 배출함으로써 당대 최고의 척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민비는 숙종비인 인현왕후의 직계후손이다. 인현왕후의 부친 민유중에게는 민진후와 민진원, 민진영 등 세 아들이 있었다. 인현왕후는 31녀 중 막내였다. 민비는 장남인 민진후의 직계 후손이고, 민영익은 민유중의 명성을 이어나간 민진원의 직계 후손이고, 민영환은 몰락한 민진영의 직계 후손이었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는 1873(고종 10) 당시 민씨 척족세력의 괴두는 민비의 양오라비인 민승호였다. 그가 폭사한 후 민영환의 생부인 민겸호가 실력자로 부상했다. 민영환이 이해에 대과에 장원급제한 것도 결코 우연으로 볼 수만도 없다. 민겸호가 임오군란 와중에 횡사한 이후에는 민승호의 양자로 들어간 민영익이 명실상부한 실세로 활약했다. 그러나 그는 갑신정변 직후 상하이로 망명하면서 사실상 정계를 은퇴하고 말았다. 민영익의 정계 은퇴 이후 민씨 척족세력의 괴두로 부상한 인물이 바로 민영환이었다. 동학농민군이 민영환을 탐관으로 지목한 것도 이와 무관할 수 없다. 이들은 민영휘를 위시한 민씨 척족세력의 배후에 민영환이 있다고 본 것이다.

-민영환은 1861(철종 12) 7월에 민겸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아들이 없는 백부 민태호(閔泰鎬)의 양자로 보내졌다. 민태호는 민겸호와 마찬가지로 학문이 없어 젊었을 때 겨우 음직인 참봉을 지냈을 뿐이다. 하지만 민비가 사실상의 대권을 장악한 후 당대의 실세가 되었다. 민영환의 중부(仲父)는 민비의 양오라비인 민승호다. 민승호는 1864(고종 1)에 대과에 급제한 뒤 출세가도를 달렸다. 이는 그가 어렸을 때 민비의 생부인 민치록의 양자로 들어간 사실과 무관치 않았다. 민승호는 1866(고종 3)에 민비가 왕비로 책봉되자 곧바로 이조참의로 발탁된 뒤 형조와 병조의 판서 자리를 두루 역임했다. 그는 대원군의 실각 후 민씨 척족세력의 괴두로 활약하다가 1874(고종 11)에 한 수령의 뇌물로 위장된 폭약상자를 열다가 일가족과 함께 폭사하고 말았다.

-민영익이 민씨 척족세력의 명실상부한 총아로 등장한 것은 민승호의 폭사에 따른 것이었다. 민비는 민승호의 폭사로 장남집안의 가통이 끊기게 되자 곧바로 민씨 일족의 중망을 받고 있는 민영익을 민승호의 양자로 맞아들여 세도정치를 면면히 이어가고자 했다. 원래 민영익의 생부 민태호는 유신환 밑에서 김윤식 등과 함께 수학한 당대의 문신이었다. 그는 대과급제 후 대제학 등을 지낸 바 있다. 그는 갑신정변 때 친청파의 괴수로 몰려 개화파 인사에게 척살당하고 말았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민영익의 생부 민태호(閔台鎬)와 민영환의 양부이자 백부인 민태호(閔泰鎬)를 동일인으로 착각해 마치 민영환이 민영익과 형제관계에 있었던 것처럼 기술해 놓고 있다. 이는 갑신정변에서 횡사한 민태호(閔台鎬)를 임오군란에서 횡사한 민겸호(閔謙鎬)의 친형인 민태호(閔泰鎬)로 착각한 데 따른 것이다.

-민비의 부친인 민치록은 장남집안, 민영익의 조부인 민교삼은 차남집안, 대원군의 장인인 민치구는 막내집안에 속했다. 민비와 대원군의 부인은 12촌 자매에 해당한다. 장남집안인 민치록의 무남독녀인 민비는 여인의 몸으로 태어나기는 했으나 장남집안의 혈통을 잇고 있었다.

-민씨 일족과 대원군 일족의 복잡한 혼맥은 민영환과 민영익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원래 민영환과 민영익은 14촌 형제에 해당한다. 당대의 명문가였던 차남집안의 민영익은 몰락한 막내집안의 민영환과 비교할 때 가세는 말할 것도 없고 나이 또한 1살이 많았다. 민영익은 모든 면에서 민영환보다 한 발 앞서 나갔다. 그는 18세에 대과에 급제한 뒤 이듬해에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다. 그는 조선조 역사상 최연소 이조참의가 된 것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폭사한 민승호의 후사로 출계해 민비를 고모로 삼게 된 데 따른 것이었다. 민영환이 출사 후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늘 민영익보다 한 발 뒤쳐져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월간조선] 開化의 물결 속에 후손들 抗日과 親日로 이어져

 

명성황후 家系의 120년 영락

開化의 물결 속에 후손들 抗日과 親日로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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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담화] 러시아 축하사절단 대표 민영환은 누구인가? <역사저널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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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실학이란 무엇인가(2007, 푸른역사)

조선후기 경화사족의 대두와 실학’(유봉학)

-‘실학을 전통주자학으로 대립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선입견과 주관적 이해는 실학실학자의 범위를 극도로 확대하게 함. 16세기 여러 주자학자(이이, 조헌, 이수광 등), 동서분당 이후 각 계열 주자학 학통 상 핵심적 인물들이 실학자로 지목되기도 함. 한편, ‘실학은 정권에서 소외되거나 몰락한 재야 지식인의 것으로 설명되기도 하나, ‘실학자대부분은 벼슬을 하여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가짐.

-주관적 실학인식은 교과서에도 반영. 현행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 실학서술은 많은 모순과 혼란을 드러내고 있음. ‘실학‘17, 18세기 사회 경제적 변동에 따른 사회 모순의 해결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대두한 학문과 사회개혁론이라고 규정하고도, ‘실학자16세기 한백겸(1552~1615), 이수광(1563~1628)으로부터 19세기 최한기(1803~1877), 김정호, 이제마(1838~1900)까지 열거하며 실학을 조선후기 전 기간에 걸치는 것으로 설명. 또한, 성리학과 실학을 대립시켜 제시하며 두 학풍 모두 3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속 변화와 발전을 인정하지 않음. 통설에 의한다면 성리학은 이기심성론과 예론에 불과한 것으로 이미 율곡 때부터 현실 문제 해결에 한계를 드러내며 정체되었으며, ‘실학이 제기되었으나 보수화된 지배층에 의해 수용되지 못하고 망국을 맞았다는 것. 이는 일제 식민사학의 전형적 논리 그대로.

-근래 연구는 1970년대 이래 유교망국론또는 주자학망국론에 입각한 조선시대사 인식을 반성하고 주자학의 수용과 발전과정을 실증적으로 연구하고 있음. 많은 중요한 실학자들이 바로 정통주자학 학통상의 핵심적 인물이었음도 확인. 18세기 현실 변화의 폭이 더 컸던 서울·경기 지역 일부 학자들에게서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경제지학(經濟之學)’명물도수지학(名物度數之學)’으로 학문적 관심을 확대하는 양상이 나타남. 낙론(洛論)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근거로 한 학문관 변화 및 낙론 주자학과 북학사상과의 연관성을 밝힘으로써 성리학과 실학을 대립적으로 보았던 기존 견해에 수정을 가함. 한편, ‘진경문화(眞景文化)’의 등장에 주목하여 숙종대~정조대를 진경시대라 명명하는 연구성과도 제출. 그 사상적 배경으로 조선중화의식등 문화자존의식을 주목하고, 사회적 배경으로 서울의 번영에 따른 -향 분기 현상과 새로운 사회세력으로서 경화사족(京華士族)’의 대두에 주목. 정조시대에는 경화사족 출신 실학자들이 개혁을 주도하고, ‘화성신도시를 건설하여, 상업과 농업 진흥 시책을 시행하면서 양반상인론국영 시범농장론을 위시한 실학자들의 구상을 실천했다는 연구성과도 존재.

-일련의 연구성과에 입각하여 실학은 숙종대에서 정조대까지 주로 18세기 경화사족 지식인들의 새로운 학풍으로 국한시켜볼 수 있음. 숙종대 후반 이후 탕평론이 제기되는 정치적 상황 변화 아래, 정통주자학은 호락논쟁의 단계로 접어들었으며, 서울의 도시적 발달, -향 분기 현상과 함께 사림도 분화하여 새로운 사회주도층으로 경화사족층이 대두. 이들 일각에서는 경제지학과 명물도수지학으로 학문 연구의 영역을 확장하였고, 이전의 북벌론을 반성하면서 북학론을 제기했으며, 급기야 정조대에는 일각에서 서학은 물론 서교(천주교)까지도 수용하려는 노력을 전개. 그러나 정조 사후 19세기 세도정치기에서 척족과 소수 경화거족(京華巨族)이 정권을 독점하며 경화사족층은 분열하였고, 정통주자학의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되고 문화자존의식이 쇠퇴. 청조 고증학이 크게 유행하고 청조 문물이 대거 수용되는 한편, 서학과 동학이 세를 확장하는 새로운 단계가 전개됨.

-조선후기 사회의 발전 과정과 그에 부응하는 학문과 사상의 단계적 전개 과정을 우선 전개하고 실학개념을 재정립하며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부여할 필요. 본고에서는 조선후기 사회와 사상, 문화 발전 과정을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하고, 그 속에서 숙종대에서 정조대까지, 그 두 번째 단계 학풍으로서 실학의 성격과 범위를 재정리.

 

사림의 집권과 경화사족의 대두

-사림은 선조대 이후 조선사회 주도세력으로 등장. 서경덕, 이황, 조식, 이이, 성혼 등을 계승한 사림학자들은 중앙에 진출하여 학문정치, 공론정치를 특징으로 하는 붕당정치를 구현하였으며, 주자학 이념에 따라 사회개혁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 양란에도 사림들의 적극적 역할로 위기를 수습할 수 있었으며, 이 시기 사림은 향촌에 머물던 재야 산림학자의 지도를 받으며 각처의 서원을 중심으로 결집. 인조반정을 계기로 사림은 정권을 확고히 장악하고 주자학의 이론적 토대 위에 사회적 안정을 추구. 효종 사후 예송은 종법질서, 나아가 예치의 실현 방법에 대한 이념적 차이로 야기된 논쟁.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는 가운데, 숙종대 이후 대체로 서인, 그 중에서도 주자주의적 지향성을 강하게 내세운 노론 계열이 정국의 주도권을 확보. 조선사회 전반에 걸쳐 주자학적 질서가 정착하면서 조선 나름의 독특한 문화가 본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으며, 이 시기 사림들의 문예활동도 활발히 전개됨. 한편, 이 시기 중원에서 청이 명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야기된 국제질서 변화는 조선 지식인들의 자아의식과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침. 병자호란 이후 고조된 조선 내부의 대명의리론, 북벌대의론은 조선중화의식을 성립시켜 조선의 문화자존의식을 강화시켰으며, 학문과 문화예술의 사상적 바탕이 됨.

-숙종 연간(1674~1720)은 조선이 양란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 조선사회는 농업 생산력 증대와 유통경제 발달로 역동적 변화를 보임. 특히, 임진왜란 이후 중국과 일본의 교역이 단절되자 조선은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획득하게 되었고, 이는 중흥의 밑거름이자 사회 변화의 계기가 됨. 박지원의 <허생전>에 등장하는 역관 출신 부호 변승업, 역관 출신 대부호 집안의 장희빈의 사례. 한편, 서울은 조선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선도하며 그 독특한 생활상이 성립. 서울 생활권이 점차 경기 지역 일원으로 확대되는 가운데, ‘귀경천향(貴京賤鄕)’ 풍조와 -향 사회적 분기현상이 현저히 드러남. 사림도 분화하여 서울과 교외(‘京郊’)의 경기 지역을 생활권으로 하는 경화사족층이 형성, 지방 향유층을 제치고 조선사회 새 주도세력으로 등장.

-탕평정국과 호락논쟁은 경화사족이 조선의 정계와 학계를 주도하는 계기가 됨. 갑술환국(1694) 이후 영남지방을 근거로 한 남인이 실세하고 노론과 소론이 주도하는 정국이 전개. 다시 노론 소론 남인 모두에서 서울·경기 지역 사림과 호서 영남 지역 사림이 분기하는 양상이 나타남. 서울과 지방의 사회적 분기 현상은 학계와 학풍의 분기로도 전개됨. 노론학계는 인물성(人物性)과 성범심(聖凡心)의 동이(同異) 문제를 놓고 서울·경기 지역의 낙론(洛論)과 호서 지역의 호론(湖論)으로 분기, 이른바 경학(京學)’호학(湖學)’이 대립. 남인학계 역시 서울·경기 지역의 남인, 경남(京南)’과 영남 지역의 남인, 영남(嶺南)’으로 분기하는 등 경·향 학계 분기는 일반적 현상. 이 가운데 경학경남이 그 세력을 확대하여 우월한 정치적 진출과 함께 학문적 우위를 점해가며 경화사족으로서 독특한 학문세계를 구축.

-이는 탕평정국이라는 정치적 조건과 조응하는 현상. 국왕이 왕권 강화를 추구하며 새로운 정치운영원리로 탕평론을 제기하였으며, 각 정파와 여러 정치세력의 조제보합(調劑保合)을 추구. 이 가운데 중앙 정계 핵심은 서울·경기 명문가 출신 각 정파 인물 위주로 재편되고, 이들 간 상호 견제 구조 위에 왕권과 정국의 안정을 도모.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경화사족은 관료학자로서 정치적 진출을 더욱 확대. 영조·정조대의 탕평정국 하에서 경화사족은 현저한 정치적 진출을 이룩하고, 사림에서 분화하여 조선사회의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대두.

 

경화사족의 새로운 문화와 학풍(‘실학)

-숙종대 이후 정착한 주자학적 생활 방식과 문화가 전통문화의 핵심적 요소가 됨(종법질서, 향약, 상하와 내외 명분 중시). 경화사족은 향유(鄕儒)와 구별되는 새로운 생활방식과 개성적 문화예술 활동 추구. 조선문화에 대한 자존의식에서 조선의 자연산천, 의관풍물을 재인식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예술활동을 정조대까지 활발하게 전개(진경시문풍, 진경산수화와 풍속화, 동국진체 등). 한편, 사장지학·의리지학 외에 경제지학과 명물도수지학을 중시하는 새로운 학문적 태도 등장. 영조대 이후 경화사족층이 서울 시정의 위항인(委巷人)까지 포함하여 확대되며 분화한 것도 새로운 학풍 등장의 조건. 경화사족 중 일부 문벌은 경화거족으로 발전한 한편, 일부는 유식(遊食)’ 계층이나 빈곤계층으로 몰락하는데, 여기서 위항인들이 경화사족에 편입됨.

-이들이 서울로부터 심화된 사회경제적 변동과 사()의 위상 변화를 절감하며 새롭게 주목한 것이 경제지학과 명물도수지학. 서울의 도시적 발달, 유통경제의 발달 같은 현실 변화에 부응하여 양반상인론같은 대안을 제시하기도 함. 박지원은 허생으로 상징되는 상업에 종사하는 새로운 지식인상을 제시. 아울러, 앞 시대 반계 유형원, 졸수재 조성기에 주목하기도 함. 그는 지식인에게 새로운 학문 연구를 촉구하고 기존의 명분론과 문화자존의식을 반성.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기호 남인과 소북 계열, 소론, 주로 노론이었던 연암일파 학자들은 사상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개방적 자세로 교류. 구체적으로는 소비적으로 흘러가던 경화사족의 생활을 반성하며, 생산의 담당자인 민의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지도하기 위한 실용적 학문 연구를 촉구.

-연암 박지원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이란 지향성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조선의 전통문화와 고전을 존중하면서도 창신을 위하여 외래의 새로운 문화를 적극 수용, 역동적 변화를 추구한 것. 이들을 중심으로 신학신문운동이 일어나자 그 파급 효과는 조선 문화 전반에 미치게 됨. 북벌론 대신 북학론을 제기하고, 청나라 학문과 문물은 물론, 때로는 서학과 서교의 수용까지도 불사함으로써 조선학계와 사상계는 큰 변동에 휩싸이게 됨.

 

북학, 서학의 수용과 사상적 갈등

-북학론과 서학론을 둘러싼 갈등은 정조 조정에서부터 야기됨. 경화사족 학자들은 정조의 탕평책과 청론사류(淸論士類) 등용 정책에 힘입어 진출하였으며, 서얼 출신의 학자들과 함께 측근에 포진하고 있었음. 따라서 이들에 대한 비판은 곧 정조의 기반 약화로 이어질 수도 있었음. 정조는 반정론(反正論)’, 사학(邪學)’의 반성을 전제로 시간을 두고 정학을 북돋운다는 부정학(扶正學)’으로 갈등을 봉합. 또한 규장각에서 주자학 관련 서적 편찬 출간 작업을 대대적으로 진행하고, 1800년 주자 서거 600주년을 맞이하여 주자학 전서 편찬을 추진.

-그러나 주자학은 절대적 지위를 잃고 청조 고증학과 비견되는 송학(宋學)’으로 상대화. ‘당괴(唐魁)’라 불린 박제가는 북학의를 제출하였으며, 정약용은 중국·서양의 과학기술을 연구하여 화성 신도시 설계의 실무를 담당. 정조 스스로도 주자학의 현실적 한계를 절감하며 불교에 의지하고, 북학과 서학을 적극 수용하여 전통문화와의 융합을 시도. 이런 양상은 정조시대 학문과 문학은 물론, 서예와 음악에 이르기까지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드러남. 정조는 수지이이의(隨地而異宜)’라는 외래 문물 수용 원칙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법고창신론과 함께 문화의 역동적 변화를 가능케 함. 한편, ()의 외연이 크게 확대된 상황에서 규장각 검서관(檢書官) 직 설치 등 중서층 출신 위항 지식인을 수용하고,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 갈등완화를 위한 상하동락원리가 강조됨. 박지원은 독서인이라면 모두 라고 주장.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서울 경화사족 사이에서 신분과 당색을 넘어선 개방적 교유가 성립(연암일파). 도시풍속도, 서민풍속도가 등장하는 것도 이 시대 문화예술의 새로운 면모.

-경화사족 학자들의 학문도 새로운 경향성을 띠었는데, 생산활동에 대한 관심과 민에 대한 지도능력의 회복을 추구. 흔히 이들을 경세치용학파=중농학파’, ‘이용후생학파=중상학파로 갈라놓기도 하나, 이들의 관심은 그 구도를 넘어 농업·공업·상업 전반에 걸치는 것이었고, 제반 산업의 유기적 연관관계 위에 생산력 극대화에 집중. 박지원의 과농소초(課農小抄),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정약용의 화성 신도시 건설 계획안, 경세유표(經世遺表)등이 경제지학 연구의 결실. 이러한 학문적 성과는 국가 정책으로 수렴. 화성 신도시 건설과 서울 사방 4유수부 체제(개성, 강화, 광주, 화성) 완성은 1일 생활권으로서 수도권 범위가 확정된 계기. 화성신도시 건설 과정에는 외래 신지식을 적극 채용하여 거중기, 수차, 벽돌 가마 등을 시험하였으며, 국영 시범농장과 국제무영시장 설치론 및 양반상인론 등을 활용.

-정조 사후 안동김씨 등 시파 세력은 척족과 일부 경화거족들만의 과두 독재체제로 정국을 운영. 정치 참여층의 축소, ‘상하동락분위기 쇠퇴, 상이한 정치 세력의 공존과 견제가 불가능해짐. 국왕이 제 역할을 못하면서 탕평정치는 붕괴하였으며, 조선후기 이래 사림정치도 와해. 정조대 개혁을 주도하였던 청론사류 중 일부는 외척세도가가 되어 비판 세력을 탄압. 이들은 청나라로부터 들어온 고증학과 문예에 경도하였고, 주자학은 물론 현실개혁을 지향하던 경제지학풍도 외면.

-반면, 집권층의 분열과 사회 분화로 여러 계층에서 다양한 학문 경향 등장. 연암 일파의 북학은 김정희, 박규수 등으로 이어져 본격화되었으며, 최한기는 북학과 서학을 아울러 수용. 한편, 향촌사회에서도 주자학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서학의 전파와 이에 맞선 동학이 확산. 이 시기 지식인들은 외척 세도정치의 극복과 함께 한학과 송학, 정학과 사학, 서학과 동학의 대립의 문제를 고민. 이 다양한 흐름은 주자학과 그 명분론, 문화자존의식 위에 수립되었던 전통적 사회질서와 문화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던 시대 상황에 따라 등장한 것으로, 전통문화와 사회체제의 청산과정이면서 실학으로 지칭되는 조선후기 사상과 문화 발전이 가져온 귀결.

 

새로운 실학론의 전망

-‘실학은 숙종 이후 정조시대까지 주로 18세기 경화사족이 제기한 새로운 학풍으로 정리할 수 있음. 전통주자학의 내재적 발전과정에서 등장하여 현실 변화에 부응하는 실용적 학풍을 특징으로 했던 실학은 경화사족의 정치적 진출과 함께 그 개혁 구상이 국가의 시책으로 수렴되기도 함. 향후 조선후기 사회경제의 구조적 변화와 연관지워 새로운 학풍을 이해하려는 심층적 보완연구가 필요.

다시, 실학이란 무엇인가(2007, 푸른역사)

조선후기 도시경제의 성장과 지식세계의 확대(고동환)

-실학사상 연구의 주된 방법은 개인 저작 분석이나, 실학사상은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하나의 사상경향이므로 그러한 연구방법에는 한계가 있음.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지역성을 중심으로 실학사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이우성이 시도. 이우성은 경세치용학파인 성호학파는 근기 지방의 농촌환경에서 성장하여 사고가 복고적·고답적이었으며, 이용후생학파인 연암학파는 도시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 생활, 의식이 진보적·개방적이었다고 설명. 이헌창은 성리학적 사유체계는 농촌체험에 적합한 사유였던 반면, 실학적 사유는 도시경제생활 체험과 친화성을 지닌 사유체계로 규정. 본 연구는 선행연구의 문제의식을 계승하여 실학과 도시성과의 관련성을 추적.

-조선후기 도시경제의 성장에는 17세기 이후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그에 따른 농민층 분화, 잉여생산물의 처분장으로서 농촌장시의 확산현상이 영향을 미침. 그러나 내적 계기보다는 전쟁과 대외교육과 같은 외적 계기가 보다 중요한 영향을 미침. 첫째,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그 자체. 전쟁은 인구와 물자의 이동을 촉진하였고, 시장이 성장하는 계기를 만듦. 둘째, 임란시 참전한 명군을 통해 은화가 유입. 당시 명나라에서 유입된 은화는 900만 냥으로 추산되며, 조선 경제가 명 은 경제권에 편입되면서 시장이 급속히 재건될 수 있었음. 은화는 이후 일반적 교환수단이 되었으며, 화폐경제의 토대를 형성. 셋째, 17세기 후반 대외교역에서 획득할 수 있는 막대한 이윤. 일본은 중국과 직교역로가 단절된 상태였기 때문에 조선을 중개지로 하여 중국과 교역할 수밖에 없었음. 조선상인들은 중국의 백사(白絲)를 수입하여 일본상인에게 은화를 받고 수출하는 중개무역을 수행. 중개무역의 이익은 역관과 함께 동래상인, 서울상인, 개성상인이 차지하였으며, 투입자본에 비해 약 2.7배의 이익을 올림.

-사상, 역관들이 축적한 상업자본은 18세기 이후 공인자본으로 투자되거나, 고리대자금으로 운용됨. 또한 중개무역으로 집적된 부는 서울에 사치풍조를 널리 확산시킴. 한편, 중개무역과정에서 왜은과 함께 왜동도 상당량 유입되어 상평통보의 원료로 활용됨. 이는 1678년 상평통보 유통 성공의 배경이며, 동전주조는 1697년까지 20년간 지속됨. 또한 중개무역의 이익으로 국가재정에 여유를 가져와 대동법의 전국적 실시에도 영향을 미침.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던 시기는 중개무역의 이익이 국내에 집적되던 시기. 대동법 시행으로 공물대신 20여 만석에 달하는 쌀과 344동에 달하는 면포, 18,000여냥에 이르는 동전이 서울로 반입됨. 상당량의 상품과 화폐는 물론, 공가와 시가와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부도 서울에 집적.

-동전의 유통과 대동법은 서울의 도시화를 촉진. 동전 유통의 성공은 상품화폐 관계의 발전과 부의 축적을 가능케 함. 대동법은 요역의 고립화(雇立化)를 정착시켜 노동력 상품화를 진전시킴. 이는 도시에서 인간관계를 화폐를 매개로 한 지배 관계로 전환시켰으며, 도시에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듦. 그 결과 서울 인구는 18세기 중엽 30만 이상으로 증가. 인구 구성 또한 변화하여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상업인구가 대부분을 차지하여 서울은 상업도시로 전환. 경제적 이해관계가 모든 것을 지배함에 따라 유교적 강상명분이 점차 퇴조하고 경제활동과 인간본성을 긍정하는 새로운 도시문화가 형성됨. 그 주체는 서울의 중간계층(역관 등의 기술직 중인, 경아전, 시전상인 등)으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과 감정을 인정하고 부의 축적을 긍정함. 이들 여항인은 문화예술적 욕구의 증대와 유흥문화의 발달로 대변되는 새로운 도시문화를 형성시킴. 도시문화가 발흥하는 과정에서 도시민들의 학문 풍토도 변모. 연암의 허생과 여항인 장혼의 사례.

-조선후기 지식세계의 가장 큰 변화는 지식세계 자체의 확대현상. 첫째, 학문적 연원의 다양화가 이루어짐. 17세기 이후 육경고학에 기초한 범유교주의, 서학, 양명학, 청조 고증학 등의 유입. 17세기 후반 조선의 지식계는 학문적 소스의 다양화 속에서 격심한 갈등을 겪었는데, 윤휴, 박세당 등이 사문난적으로 몰린 것이 그 사례. 이 중 실학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주자성리학, 육경고학, 서학이었음. 유형원은 성리학의 의리 중심의 사회인식을 비판하고 실리를 궁극적 원리로 삼아 범유교 입장에서 사회적 위기 극복 방안을 제시. 한편, 서학의 전래도 실학에 큰 영향을 미침. 그러나 서학사상의 수용과정은 전통적 지식체계의 논리 하에서의 수용이었으며, 일부 학문에 편중될 수밖에 없었음.

-둘째, 지식의 유통속도의 증가와 유통체제의 확립. 17세기 후반 서학의 파급력을 정확히 파악하긴 어려우나, 서학은 소수의 연행사절이나 학자들만이 아니라 서울 사대부에게 널리 전파된 것으로 보임. 한편, 지식의 유통체제라고 할 수 있는 서책의 간행과 유통시스템도 성장. 서책을 판매하는 책사, 책을 대여하는 세책가, 책장수의 등장 등. 책의 유통과정에서 출판보다는 필사가 많이 이루어짐. 이러한 세책(貰冊), 매책(賣冊), 필사(筆寫) 등의 방식으로 지식은 일반 대중에게 널리 확산될 수 있었음.

셋째, 지식계층의 확대. 우선 초등교육기관인 서당의 증가를 꼽을 수 있음. 16세기 말 서원의 증가에 따라 그 부속교육기관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서당은 17세기 이후 서원과 독립된 사설 향촌교육기관으로 자리잡았으며, 사족이 연합하여 몇 개의 자연촌을 대상으로 서당을 설립하기도 함. 그러나 18세기 소규모 자산으로 운영이 가능한 서당계가 고안됨으로써 평민층도 서당을 운영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 이 시기 평민중심의 교재, 직업적 고용훈장의 등장 등 서당교육의 일대 변혁이 나타남. 서당의 확대와 초보적 교재의 대량 간행은 초급 지식인층이 양산되는 기반이었음. 이 시기 농촌에 정착하여 훈장, 의업, 소장대서업(訴狀代書業), 복술(卜術) 등에 종사하는 농민적 지식인이 등장. 이들은 19세기 행정문서, 법률문서의 간편화·정식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문자를 모르는 농민들의 솟장을 대신 작성해주는 역할을 하였으며, 농민항쟁기 지도자로 활약(전봉준). 농민적 지식인의 성장은 19세기 향촌사회문제의 해결방식을 관문회곡(官門會哭)-정소(呈訴)-민란으로 전화시킴. 이처럼 조선후기 확대된 지식세계에는 유학자와 더불어 하급지식인이 성장하였으며, 농민적 지향을 지닌 새로운 지식세계가 부가되었음. 동시에 도시문화의 발흥과 함께 확장된 지식세계가 19세기 이후 농촌과 향촌사회로 파급됨을 보여줌.

-반계, 성호, 다산은 모두 서울과 근기 지역 출신으로 도시경제의 세례 속에서 자신의 학문적 지평을 전개. 반계는 32세 부안의 우반동에 은거하기 전까지 서울과 경기 지역에 거주하며 그 학풍에 영향을 받음. 반계의 저작은 왕을 비롯한 조정의 신하, 향촌의 유생들에게까지 두루 읽히며 높은 평가를 받음. 성호는 광주에 살며 성호학파를 형성. 정약용도 근기와 서울에서 생활하며 학문을 형성. 그의 저작은 당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지녔으며 현직 관리들에게 직접 활용되기도 함. 이처럼 실학은 재야지식인의 소외된 사유체계가 아니었으며, 실학사상가들의 저작은 널리 보급되어 당대 지식세계의 주류적 위치에 있었음. 또한 실학자들의 저작 중 각종 실무적 지침서 등은 농민의 현실적 필요에 의해 널리 보급되고 수용되었으며, 새로 등장한 농민적 지식계층이 만날 수 있는 접점이었음. 실학사상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사회개혁론과 연결될 수도 있었으나, 당시 농민적 지식계층은 실학사상의 개혁론보다는 농촌의 생활체험에 기반한 동학사상에 경도되고 있었던 것이 현실.

 

다시, 실학이란 무엇인가(2007, 푸른역사)

지리학과 실학(배우성)

-이 글에서는 대표적 실학지리서로 꼽히는 택리지(擇里志), 서구식 세계지도에 관한 문제를 검토. 지리사상과 세계관의 차원에서 실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조가 있다면 그 본질은 무엇인가.

-한반도 중심의 지역 연구와 지도 제작은 조선후기 지리학의 특징적 양상 혹은 민족의 독자적 공간관을 수립하려 한 노력으로 평가받음. 영조대에는 특히 관찬 지리지 및 지도 편찬 사업이 활발했음. 여지도서(輿地圖書), 비변사가 1750년대부터 펴내기 시작한 모눈 형식의 도별 군현지도집 등. 영조대의 지리지, 지도 편찬 사업에는 천문학자나 지리학자가 참여하기도 함. 이중환이 개인적으로 펴낸 택리지는 가장 실학적인 지리서로 평가받음. 더 많은 지리 지식이 보급되자 이것을 새로운 형식으로 변용한 책자들이 나오기도 했으며, 중국, 일본에 관한 지리정보 역시 한반도를 상대화하는 데 영향을 미침.

-‘실학자들이 예외 없이 서구식 세계지도를 보고 넓은 세계를 인정했다고 하긴 어려우나, 넓은 세계를 인정했던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실학자로 불리고 있는 것은 사실(안정복, 이익, 정약용, 최한기 등). 서울만큼 쉽진 않았으나, 지방에서도 세계지도를 너무 귀해서 구해볼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음.

-택리지는 이중환이 살 만한 곳을 찾아 헤맨 기록. 이중환은 인심항목에서 당쟁과 탕평의 구조를 분석했는데, 선조대 이래로 계속된 당쟁의 폐단이 영조대 이르러 더욱 심각해졌으며, 이조전랑 자대제를 폐지하고 사색당파를 안배해 등용하는 영조대 인재 선발 방식이 사대부의 도덕적 타락을 불러일으켰다고 평가. 정치사연구자들이 항목에 주목하여 전랑권을 기초로 한 사림정치, 그것을 붕괴시킨 탕평정치의 권력구조를 이해하는 중요한 근거로 활용. 한편, 택리지의 경제, 지리 관련 내용을 실학적으로 이해하여, 이중환을 농업생산력 향상과 상업적 농업경영, 선박에 의한 물자 유통과 대내외 교역 등을 통해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려 한 인물로 평가. 또한 택리지가 한국적 취락입지 모델을 연구한 근대지향적인문지리서로 평가하기도 함.

-그러나 택리지를 최남선이 조선광문회에서 펴낸 활자본이 아닌 18, 19세기에 널리 유행했던 다양한 종류의 필사본 텍스트로 독해하면 전혀 다른 평가를 할 수 있음. 최남선이 교열한 조선광문회본 택리지는 조선후기 유행했던 일부 내용을 과감히 수정, 새롭게 교열한 것. 이를 통해 택리지를 다시 독해하면, 이중환은 누구나 살 만한 곳이 아니라, 사대부적 가치가 공유되는 세상을 전제로 명백하게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찾았음. 한편, 그의 청년기 생애를 검토하면 그가 도연명의 삶을 동경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이중환은 유교적 관념의 울타리 안에서 풍수지리적 표현을 구사했음.

-지리적 시야의 확대는 실학의 특징 중 하나로 거론되어옴. 일례로, 홍대용이 화이일야(華夷一也)’의 세계관을 선포한 것은 중화주의 종말을 선언한 것으로 평가. 그러나 서구식 세계지도에 대한 인식을 다시 검토할 필요. 하이(蝦夷, 홋카이도)와 일본열도에 대한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인식을 살펴보면, 그들이 서구식 세계지도에 담긴 지리정보를 절대적인 것으로 수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음. 일본 열도와 하이의 위치, 상대적 거리감 등은 동북아시아 국제질서에 대한 판단 위에서 형성되었으며, 그 지식이야말로 가장 신뢰할 만한 정보로 여겨짐. 서구식 세계지도의 지리정보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인식과 부합된다고 여겨질 때 비로소 신뢰의 대상이 됨.

-서구식 세계지도를 지리적 시야의 확대’, ‘중화적 세계관의 탈피와 동의어로 간주하는 데 신중할 필요. 한국에 남아 있는 세계지도 사본들의 숫자도 현저히 적음. 물론 서구식 세계지도가 조선 지식인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으나, 그것이 재해석되거나 받아들여지는 양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음.

-<천하도>산해경에서 따온 상상의 지명을 다수 담고 있는데, 이를 도교적 세계관을 표현한 것으로 단정할 수 없음. 그것은 조선사회에 보급된 타원형 세계지도의 영향의 산물. 조선 지식인들은 산해경을 제외한 다른 어떤 동양사회 문건들에서도 넓은 세계를 표현한 전례를 발견하기 어려웠으며, 이를 재구성하는 것 이외에 넓은 세계 구성을 표현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던 것. <천하도>는 서구식 세계지도의 보급에도 19세기 말까지 지식인 사회에서 유행했음. 일례로, 19세기 지식인 이종휘는 마테오 리치의 세계지도를 추연의 세계관과 관련지어 해석. 왜곡된 세계를 반영한 <천하도>의 한계에도 독자적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것.

-필사본 택리지에 나타나는 중화주의자로서 이중환의 면모는 최남선의 교열에 의해 거의 사라지거나 비틀림. 이중환에게 중화의식은 매우 중요한 변수였으며, 중화의식은 조선후기 지식인들이 서구식 세계지도를 수용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침. 여기서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중화의식은 소중화의식과 조선중화의식을 양 끝으로 하는 긴 스펙트럼이었으며, 홍대용조차 중화 그 자체를 무의미하게 보지는 않았음. 우리가 실학적이라고 불렀던 지리사상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중화의식과 무관할 수 없다는 점이 중요. 중화의식이 중국에 대한 예속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면, ‘실학적지리인식과 세계관이 작동하는 다양한 층위로 읽혀야 함.

-지리적 시야는 단순히 새로운 지리정보와의 접촉이 아니라, 중화와의 의미적 연관 속에서 확대. 외부세계는 중화세계와의 문화적 지리적 거리, 연관의 정도라는 척도에서 의미가 파생되는 지역이었음. 서역처럼 원래부터 중국의 주변이었던 곳은 전통적인 외부세계이며, 서구식 세계지도에 그려진 유럽과 신대륙 등은 중국 중심의 세계 안으로 내면화될 경우 비로소 새로운 외부세계가 될 수 있었음(대청일통지, 고금도서집성의 사례).

-중요한 것은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지리사상과 세계관을 그들의 삶과 철학이라는 컨텍스트 위에서 이해하는 것. 그들의 사유는 적어도 당대적 의미에서 실용적이고 독자적이었으며, 그런 맥락에서 실학적이었음. 그들 사유의 실용성과 실제성은 통합적, 상관적(相關的) 사유방식에서 나왔으며, 그 근본에는 성리학과 중화주의가 있었음. 그러나 그 사고방식을 변동하는 사회현실에까지 확대 적용했다는 점에서 실학적 의미가 존재. 또한 이질적인 문화를 자신들의 언어로 이해해보고자 했던 점에서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지리사상은 독자적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실학적.

다시, 실학이란 무엇인가(2007, 푸른역사)

조선후기 자연인식의 변화와 실학’(구만옥)

-조선후기 과학기술사 연구는 주로 실학과의 관련 속에서 진행되어옴. 주요 연구 대상이 이익, 홍대용, 정약용, 최한기 등. 이러한 일련의 연구들은 실학의 근대(지향성)을 염두에 두고 전개됨. 실학이 근대지향성을 지닌다면 당연히 과학기술에 대한 강조, 그 근거가 되는 자연관의 변화가 기대되었기 때문.

-최근 연구는 실학자들의 논의에서 서구적 요소를 전통적 사유 속에 포괄하고자 하는 절충적·보수적 태도에 주목. , 실학자들은 서구 과학기술의 다양한 요소 중 합리적이라고 판단되는 것들을 선별하여 전통적 요소를 보완·개량하는 데 이용했다는 것. 쟁점은 진보와 보수, 변화와 연속을 판단하는 비교의 준거를 어디에 둘 것인가. 대체로 주자학으로부터의 이탈만으로는 무리라 보며, 그 준거를 동아시아 고전적 전통에서 구하고 있음(주희의 자연철학과의 비교, 17세기 이후 중국과 조선 학자들의 과학담론의 상호 연관성과 역사적 연원 등).

-주자학에서 자연은 사물의 본연의 상태를 형용하는 부사로서, ()=천리(天理)라는 말에 부수되어 그 존재양태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됨. 주자학에서 인간사회의 운영원리인 도리(道理)와 자연법칙인 물리(物理)는 일관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천=리라는 개념으로 형상화. 여기서 자연은 인간의 도덕적 선천성을 가리킴. 인간의 도덕성을 본성의 자연으로 이해하고, 그 안에 객관세계의 자연법칙까지 포섭하고자 한 데 주자학적 자연학의 특징이 존재. 한편, 주자학의 격물치지론에 등장하는 물리도 대부분 사리(事理)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격물의 목표인 물리는 사물의 이치로서 인간사회의 원리와 자연세계의 법칙을 두루 포괄.

-주자학의 격물치지론은 중세적 합리주의를 뒷받침하는 인식론으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으나, 한계도 존재. 격물의 물은 자연 그 자체만이 아니라 관념적인 천()의 의지이기도 했으며, 치지의 지는 과학적 지식만이 아니라 윤리적 규범을 의미. , 자연법칙과 도덕규범을 연속시켜 자연의 물리와 인간의 도리를 통일적으로 파악, 천지상하의 자연질서는 인간세상의 상하관계적 신분질서로 나타난 것. 격물치지론의 대상은 객관적 자연물이 아니라 성경현전(聖經賢傳)이었음. 주자학적 자연학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도리로부터 물리의 해방, 인간학으로부터 자연학의 자립화가 선행되어야 했음. 조선후기 자연인식의 변화, 이른바 실학적 자연인식의 등장은 바로 이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지님.

-정제두는 인간사회의 운영원리로서의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과 자연법칙으로서의 소이연지리(所以然之理)’를 구분하고, 후자는 지식과 기예를 통해 탐구해 가야 하는 것임을 명시. 이것은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로 간주되는 성인의 학문 범위가 인간사회의 소당연지칙에 국한된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 , 인간사회의 운영원리와 자연법칙은 선천적 지식과 후천적 지식으로 구분되었으며, 양자 사이의 직접적 관련성은 부인됨.

-정약용은 효제(孝弟예의(禮義)로 표상되는 인간학(도덕학)과 이용후생(利用厚生백공기예(百工技藝)로 대변되는 자연학(기술학)을 구분하였음, 후자는 뒤에 나온 제도에 힘입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함. 그가 사용하는 물리의 개념은 대체로 자연물의 속성, 기술의 원리, 자연 법칙 등을 의미.

-조선후기 물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박학적 성격의 학문 경향으로 이어짐. 본래 주자학자들이 생각한 박학은 세밀한 경전 주석을 의미. 반면 실학에서 말하는 박학의 범위 안에는 인간사회의 제도규식과 함께 자연현상을 포함. 유형원의 제도규식에 대한 연구(반계수록), 이익의 실학을 하고자 한다면 사무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 사례. 홍대용은 학문을 체와 용으로 구분하고 정심·성의로 대변되는 개인의 도덕적 수양의 중요성과 함께 개물성무로 표현되는 사회적 실천을 중시. 특히, 개물성무 안에는 읍양승강이라는 도덕적 실천 영역과 함께 율력·산수·전곡·갑변이라는 실용적 영역을 강조. , 그의 궁리·격물 공부는 자연물을 대상을 했음.

-이와 같은 학문 경향의 변화 속에서 종래 경전 주석학의 일종으로 물리를 논했던 상수학(象數學)과 명물도수지학(名物度數之學)의 내용에 변화가 일어남. 전통적인 상수학에서 역학과 관련된 논의를 탈각시키고, 오로지 서양에서 전래된 수학·기하학 등 수리과학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등장. 이는 역리(易理)라는 선험적 진리를 전제로 자연현상을 연역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에서, 수학적인 방법에 기초하여 정량적으로 자연을 분석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 한편, 명물도수지학은 그 이치가 깊고 범위가 넓기에 개별적 탐구를 통해 그 이치를 터득해가야 한다고 인식되는 경향이 존재.

-박학적 학문 경향과 자연세계에 대한 관심이 증대함에 따라, 실학의 학문 체계 내에서 자연학은 점차 독립적 분야로 자리를 확보해 가고 있었음. 한편, 실학이 독립된 학문체계로서 존립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주자학과는 다른 학문적 목적과 내용상의 특징 및 방법론상의 변화가 있어야만 함. 이를 검토하기 위해 실용실증이라는 측면에 주목해서 실학적 자연학의 가능성을 모색해보기로 함.

-홍대용을 비롯한 노론 낙론계 북학파 학자들은 학문의 실용성에 주목. 홍대용은 율력(律曆산수(筭數전곡(錢穀갑병(甲兵)의 학문적 중요성을 적용이수세(適用而需世, 쓰임에 적당하고 세상에 필요함)’라는 개념으로 표현. 박지원은 이용후생(利用厚生)’ 개념을 통해 학문의 실용성을 강조. 특히, 그는 이용한 다음에야 후생할 수 있고, 후생한 다음에야 그 덕을 바르게 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여, 전통적인 정덕(正德)이용후생의 순서를 거꾸로 바꾸었음. 정덕과 수신의 문제에 집중하여 구체적 현실 문제에 접근하지 못한 주자학자들과 달리, 박지원을 비롯한 실학자는 이용후생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북벌론을 북학론으로 대체하였고 서양문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것. 정약용은 이용후생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그를 위해 중국의 선진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을 주장. 그에게 이용후생은 정덕에 버금가는 것으로, 각종 기계를 제작해 민생에 도움을 주는 것을 목민관의 기본 임무로 설정.

-최한기는 민생일용의 이용후생에 보탬이 되는 것이 민업(民業)을 가르치고 민산(民産)을 안정시키는 방법이 된다고 보았음. , 이용후생이 실제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는 백공기예(百工技藝)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도 드러나는데, 그는 백공기예를 종신토록 그 기술을 익혀야 하는 것이지만 반드시 안팎으로 기의 숙성을 도모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민생의 일용에 도움이 되는가 여부에 따라 그 쓸모를 따졌음. 정약용은 백공기예를 후출유공(後出愈工)’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 나름의 가치를 인정. 이러한 발상의 배후에는 물질적 생산방식과 이와 연관된 자연학의 독자적 가치를 인정하는 관념이 존재했음. 물리와 자연학에 대한 진전된 이해를 기초로 기술의 경험 축적을 통해 진보가 일어난다는 관념이 정립되고 있었던 것. 또한 정약용은 백공기예가 수리에 근본한다고 파악한 바, 무엇보다 그 수학적 원리가 밝혀질 필요가 있다고 보았음. 이는 조선후기 수학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표현.

-이른바 실학자들에게 보이는 특징은 전통적인 격물치지의 수양론적 성격을 인식론상의 객관주의적 태도로 치환한다는 점. 격물치지의 대상과 방법은 주관과 선험보다 객관적 감각과 경험을 중시하는 쪽으로 중심이동이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수학과 실측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등장. 조선후기 서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지식인들은 서양과학의 우수성을 수학과 실측의 전통에서 찾음. 홍대용은 서양의 수학[算術]과 천문의기[儀象]를 높이 평가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우주론[論天]과 역법에서 서양의 천문역산학이 우수함을 인정. 그 결과 나타난 그의 저작이 주해수용(籌解需用). 서호수(徐浩修)수리정온보해서(數理精蘊補解序)에서 수학을 경제학의 본질로, 수학서를 세상을 다스리는 도구로 높이 평가. 그의 장남이자 서유구의 친형인 서유본(徐有本) 역시 기하몽구(幾何蒙求)라는 수학책을 편찬하였고, 기수(氣數)를 통한 이치의 발명이라는 차원에서 상수학·도수지학을 중시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측험(測驗)’을 강조. 이가환은 도수지학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조선의 천문역산학[曆象] 개혁을 주장하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도수지학이라는 본원을 먼저 밝혀야 한다고 강조. 또한 명물도수지학은 세대가 내려오면서 더욱 발전하게 된다는 인식 하에, 상고주의는 변통에 적합한 논리가 아니며 도수지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마땅히 신법을 채택해야 한다고 보았음. 실측과 도수지학에 대한 강조는 소론계 양명학파 유희(柳僖)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음. 그는 서양의 천문역산학이 우수하게 된 요인으로 수학과 의기를 중시하는 서양의 풍속을 들었으며, 실증과 실측의 중요성도 강조.

-실학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 쟁점은 실학과 주자학의 상호 관계. 이에 따라 과학기술의 측면에서도 실학의 과학기술론을 질적 전환으로 이해하여 근대를 지향한 것으로 파악할 것인가, 실학의 과학기술론이 여전히 주자학의 틀 내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인가로 달라질 수 있음. 논의의 진전을 위해 다음을 고려할 필요. 첫째, ‘실학자들은 왜 과학기술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을까. 취미, 실용적 수단, 근본적 물리에 대한 재인식 등 관심의 층차가 다양하기 때문에 이를 분별할 필요가 있음. 둘째, ‘실학자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의 정도와 수준은 어떠하였을까. 그것은 주자학의 테두리에 머물러 있었는가, 새로운 자연학의 가능성을 만들어가고 있었는가. 셋째, ‘실학자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에 전통과학과 서양과학은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쳤으며, 양자의 상호 작용은 어떠했는가. 전통적인 자연지식의 기초 위에서 서양과학을 수용한 구체적 경로와 그 결과는 무엇인가. 넷째, 양란 이후 개항 이전까지 실학자들이 활동했던 시기에 과학지식 내지 과학사상의 측면에서 계승·발전이 있었는가, 만약 있었다면 그것을 계통화할 수 있는가. 궁극적으로 과연 실학에서 과학기술이 어떤 의미를 차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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