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실학이란 무엇인가(2007, 푸른역사)
조선후기 ‘자연’ 인식의 변화와 ‘실학’(구만옥)
-조선후기 과학기술사 연구는 주로 실학과의 관련 속에서 진행되어옴. 주요 연구 대상이 이익, 홍대용, 정약용, 최한기 등. 이러한 일련의 연구들은 실학의 근대(지향성)을 염두에 두고 전개됨. 실학이 근대지향성을 지닌다면 당연히 과학기술에 대한 강조, 그 근거가 되는 자연관의 변화가 기대되었기 때문.
-최근 연구는 실학자들의 논의에서 서구적 요소를 전통적 사유 속에 포괄하고자 하는 절충적·보수적 태도에 주목. 즉, 실학자들은 서구 과학기술의 다양한 요소 중 ‘합리적’이라고 판단되는 것들을 선별하여 전통적 요소를 보완·개량하는 데 이용했다는 것. 쟁점은 진보와 보수, 변화와 연속을 판단하는 ‘비교의 준거’를 어디에 둘 것인가. 대체로 주자학으로부터의 이탈만으로는 무리라 보며, 그 준거를 동아시아 고전적 전통에서 구하고 있음(주희의 자연철학과의 비교, 17세기 이후 중국과 조선 학자들의 과학담론의 상호 연관성과 역사적 연원 등).
-주자학에서 ‘자연’은 사물의 본연의 상태를 형용하는 부사로서, 리(理)=천리(天理)라는 말에 부수되어 그 존재양태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됨. 주자학에서 인간사회의 운영원리인 도리(道理)와 자연법칙인 물리(物理)는 일관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천=리라는 개념으로 형상화. 여기서 ‘자연’은 인간의 도덕적 선천성을 가리킴. 인간의 도덕성을 본성의 ‘자연’으로 이해하고, 그 안에 객관세계의 자연법칙까지 포섭하고자 한 데 주자학적 자연학의 특징이 존재. 한편, 주자학의 격물치지론에 등장하는 물리도 대부분 사리(事理)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격물의 목표인 물리는 ‘사물의 이치’로서 인간사회의 원리와 자연세계의 법칙을 두루 포괄.
-주자학의 격물치지론은 중세적 합리주의를 뒷받침하는 인식론으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으나, 한계도 존재. 격물의 물은 자연 그 자체만이 아니라 관념적인 천(天)의 의지이기도 했으며, 치지의 지는 과학적 지식만이 아니라 윤리적 규범을 의미. 즉, 자연법칙과 도덕규범을 연속시켜 자연의 물리와 인간의 도리를 통일적으로 파악, 천지상하의 자연질서는 인간세상의 상하관계적 신분질서로 나타난 것. 격물치지론의 대상은 객관적 자연물이 아니라 성경현전(聖經賢傳)이었음. 주자학적 자연학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도리로부터 물리의 해방, 인간학으로부터 자연학의 자립화가 선행되어야 했음. 조선후기 자연인식의 변화, 이른바 실학적 자연인식의 등장은 바로 이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지님.
-정제두는 인간사회의 운영원리로서의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과 자연법칙으로서의 ‘소이연지리(所以然之理)’를 구분하고, 후자는 지식과 기예를 통해 탐구해 가야 하는 것임을 명시. 이것은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로 간주되는 성인의 학문 범위가 인간사회의 ‘소당연지칙’에 국한된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 즉, 인간사회의 운영원리와 자연법칙은 선천적 지식과 후천적 지식으로 구분되었으며, 양자 사이의 직접적 관련성은 부인됨.
-정약용은 효제(孝弟)·예의(禮義)로 표상되는 인간학(도덕학)과 이용후생(利用厚生)·백공기예(百工技藝)로 대변되는 자연학(기술학)을 구분하였음, 후자는 ‘뒤에 나온 제도’에 힘입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함. 그가 사용하는 물리의 개념은 대체로 자연물의 속성, 기술의 원리, 자연 법칙 등을 의미.
-조선후기 물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박학적 성격의 학문 경향으로 이어짐. 본래 주자학자들이 생각한 ‘박학’은 세밀한 경전 주석을 의미. 반면 ‘실학’에서 말하는 박학의 범위 안에는 인간사회의 제도규식과 함께 자연현상을 포함. 유형원의 제도규식에 대한 연구(반계수록), 이익의 ‘실학’을 하고자 한다면 ‘사무’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 사례. 홍대용은 학문을 체와 용으로 구분하고 정심·성의로 대변되는 개인의 도덕적 수양의 중요성과 함께 개물성무로 표현되는 사회적 실천을 중시. 특히, 개물성무 안에는 읍양승강이라는 도덕적 실천 영역과 함께 율력·산수·전곡·갑변이라는 실용적 영역을 강조. 즉, 그의 궁리·격물 공부는 자연물을 대상을 했음.
-이와 같은 학문 경향의 변화 속에서 종래 경전 주석학의 일종으로 ‘물리’를 논했던 상수학(象數學)과 명물도수지학(名物度數之學)의 내용에 변화가 일어남. 전통적인 상수학에서 역학과 관련된 논의를 탈각시키고, 오로지 서양에서 전래된 수학·기하학 등 수리과학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등장. 이는 역리(易理)라는 선험적 진리를 전제로 자연현상을 연역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에서, 수학적인 방법에 기초하여 정량적으로 자연을 분석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 한편, 명물도수지학은 그 이치가 깊고 범위가 넓기에 개별적 탐구를 통해 그 이치를 터득해가야 한다고 인식되는 경향이 존재.
-박학적 학문 경향과 자연세계에 대한 관심이 증대함에 따라, 실학의 학문 체계 내에서 자연학은 점차 독립적 분야로 자리를 확보해 가고 있었음. 한편, 실학이 독립된 학문체계로서 존립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주자학과는 다른 학문적 목적과 내용상의 특징 및 방법론상의 변화가 있어야만 함. 이를 검토하기 위해 ‘실용’과 ‘실증’이라는 측면에 주목해서 실학적 자연학의 가능성을 모색해보기로 함.
-홍대용을 비롯한 노론 낙론계 북학파 학자들은 학문의 실용성에 주목. 홍대용은 율력(律曆)·산수(筭數)·전곡(錢穀)·갑병(甲兵)의 학문적 중요성을 ‘적용이수세(適用而需世, 쓰임에 적당하고 세상에 필요함)’라는 개념으로 표현. 박지원은 ‘이용후생(利用厚生)’ 개념을 통해 학문의 실용성을 강조. 특히, 그는 “이용한 다음에야 후생할 수 있고, 후생한 다음에야 그 덕을 바르게 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여, 전통적인 정덕(正德)→이용→후생의 순서를 거꾸로 바꾸었음. 정덕과 수신의 문제에 집중하여 구체적 현실 문제에 접근하지 못한 주자학자들과 달리, 박지원을 비롯한 실학자는 이용후생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북벌론을 북학론으로 대체하였고 서양문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것. 정약용은 이용후생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그를 위해 중국의 선진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을 주장. 그에게 이용후생은 정덕에 버금가는 것으로, 각종 기계를 제작해 민생에 도움을 주는 것을 목민관의 기본 임무로 설정.
-최한기는 민생일용의 이용후생에 보탬이 되는 것이 민업(民業)을 가르치고 민산(民産)을 안정시키는 방법이 된다고 보았음. 즉, 이용후생이 실제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는 백공기예(百工技藝)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도 드러나는데, 그는 백공기예를 종신토록 그 기술을 익혀야 하는 것이지만 반드시 안팎으로 기의 숙성을 도모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민생의 일용에 도움이 되는가 여부에 따라 그 쓸모를 따졌음. 정약용은 백공기예를 ‘후출유공(後出愈工)’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 나름의 가치를 인정. 이러한 발상의 배후에는 물질적 생산방식과 이와 연관된 자연학의 독자적 가치를 인정하는 관념이 존재했음. 물리와 자연학에 대한 진전된 이해를 기초로 기술의 경험 축적을 통해 진보가 일어난다는 관념이 정립되고 있었던 것. 또한 정약용은 ‘백공기예’가 수리에 근본한다고 파악한 바, 무엇보다 그 수학적 원리가 밝혀질 필요가 있다고 보았음. 이는 조선후기 수학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표현.
-이른바 실학자들에게 보이는 특징은 전통적인 격물치지의 수양론적 성격을 인식론상의 객관주의적 태도로 치환한다는 점. 격물치지의 대상과 방법은 주관과 선험보다 객관적 감각과 경험을 중시하는 쪽으로 중심이동이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수학과 실측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등장. 조선후기 서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지식인들은 서양과학의 우수성을 ‘수학과 실측의 전통’에서 찾음. 홍대용은 서양의 수학[算術]과 천문의기[儀象]를 높이 평가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우주론[論天]과 역법에서 서양의 천문역산학이 우수함을 인정. 그 결과 나타난 그의 저작이 《주해수용(籌解需用)》. 서호수(徐浩修)는 〈수리정온보해서(數理精蘊補解序)〉에서 수학을 경제학의 본질로, 수학서를 세상을 다스리는 도구로 높이 평가. 그의 장남이자 서유구의 친형인 서유본(徐有本) 역시 《기하몽구(幾何蒙求)》라는 수학책을 편찬하였고, 기수(氣數)를 통한 이치의 발명이라는 차원에서 상수학·도수지학을 중시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측험(測驗)’을 강조. 이가환은 ‘도수지학’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조선의 천문역산학[曆象] 개혁을 주장하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도수지학’이라는 본원을 먼저 밝혀야 한다고 강조. 또한 명물도수지학은 세대가 내려오면서 더욱 발전하게 된다는 인식 하에, 상고주의는 변통에 적합한 논리가 아니며 도수지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마땅히 ‘신법’을 채택해야 한다고 보았음. 실측과 도수지학에 대한 강조는 소론계 양명학파 유희(柳僖)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음. 그는 서양의 천문역산학이 우수하게 된 요인으로 수학과 의기를 중시하는 서양의 풍속을 들었으며, 실증과 실측의 중요성도 강조.
-실학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 쟁점은 실학과 주자학의 상호 관계. 이에 따라 과학기술의 측면에서도 실학의 과학기술론을 질적 전환으로 이해하여 근대를 지향한 것으로 파악할 것인가, 실학의 과학기술론이 여전히 주자학의 틀 내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인가로 달라질 수 있음. 논의의 진전을 위해 다음을 고려할 필요. 첫째, ‘실학자’들은 왜 과학기술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을까. 취미, 실용적 수단, 근본적 물리에 대한 재인식 등 관심의 층차가 다양하기 때문에 이를 분별할 필요가 있음. 둘째, ‘실학자’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의 정도와 수준은 어떠하였을까. 그것은 주자학의 테두리에 머물러 있었는가, 새로운 자연학의 가능성을 만들어가고 있었는가. 셋째, ‘실학자’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에 전통과학과 서양과학은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쳤으며, 양자의 상호 작용은 어떠했는가. 전통적인 자연지식의 기초 위에서 서양과학을 수용한 구체적 경로와 그 결과는 무엇인가. 넷째, 양란 이후 개항 이전까지 실학자들이 활동했던 시기에 과학지식 내지 과학사상의 측면에서 계승·발전이 있었는가, 만약 있었다면 그것을 계통화할 수 있는가. 궁극적으로 과연 ‘실학’에서 과학기술이 어떤 의미를 차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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