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실학이란 무엇인가(2007, 푸른역사)

조선후기 경화사족의 대두와 실학’(유봉학)

-‘실학을 전통주자학으로 대립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선입견과 주관적 이해는 실학실학자의 범위를 극도로 확대하게 함. 16세기 여러 주자학자(이이, 조헌, 이수광 등), 동서분당 이후 각 계열 주자학 학통 상 핵심적 인물들이 실학자로 지목되기도 함. 한편, ‘실학은 정권에서 소외되거나 몰락한 재야 지식인의 것으로 설명되기도 하나, ‘실학자대부분은 벼슬을 하여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가짐.

-주관적 실학인식은 교과서에도 반영. 현행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 실학서술은 많은 모순과 혼란을 드러내고 있음. ‘실학‘17, 18세기 사회 경제적 변동에 따른 사회 모순의 해결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대두한 학문과 사회개혁론이라고 규정하고도, ‘실학자16세기 한백겸(1552~1615), 이수광(1563~1628)으로부터 19세기 최한기(1803~1877), 김정호, 이제마(1838~1900)까지 열거하며 실학을 조선후기 전 기간에 걸치는 것으로 설명. 또한, 성리학과 실학을 대립시켜 제시하며 두 학풍 모두 3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속 변화와 발전을 인정하지 않음. 통설에 의한다면 성리학은 이기심성론과 예론에 불과한 것으로 이미 율곡 때부터 현실 문제 해결에 한계를 드러내며 정체되었으며, ‘실학이 제기되었으나 보수화된 지배층에 의해 수용되지 못하고 망국을 맞았다는 것. 이는 일제 식민사학의 전형적 논리 그대로.

-근래 연구는 1970년대 이래 유교망국론또는 주자학망국론에 입각한 조선시대사 인식을 반성하고 주자학의 수용과 발전과정을 실증적으로 연구하고 있음. 많은 중요한 실학자들이 바로 정통주자학 학통상의 핵심적 인물이었음도 확인. 18세기 현실 변화의 폭이 더 컸던 서울·경기 지역 일부 학자들에게서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경제지학(經濟之學)’명물도수지학(名物度數之學)’으로 학문적 관심을 확대하는 양상이 나타남. 낙론(洛論)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근거로 한 학문관 변화 및 낙론 주자학과 북학사상과의 연관성을 밝힘으로써 성리학과 실학을 대립적으로 보았던 기존 견해에 수정을 가함. 한편, ‘진경문화(眞景文化)’의 등장에 주목하여 숙종대~정조대를 진경시대라 명명하는 연구성과도 제출. 그 사상적 배경으로 조선중화의식등 문화자존의식을 주목하고, 사회적 배경으로 서울의 번영에 따른 -향 분기 현상과 새로운 사회세력으로서 경화사족(京華士族)’의 대두에 주목. 정조시대에는 경화사족 출신 실학자들이 개혁을 주도하고, ‘화성신도시를 건설하여, 상업과 농업 진흥 시책을 시행하면서 양반상인론국영 시범농장론을 위시한 실학자들의 구상을 실천했다는 연구성과도 존재.

-일련의 연구성과에 입각하여 실학은 숙종대에서 정조대까지 주로 18세기 경화사족 지식인들의 새로운 학풍으로 국한시켜볼 수 있음. 숙종대 후반 이후 탕평론이 제기되는 정치적 상황 변화 아래, 정통주자학은 호락논쟁의 단계로 접어들었으며, 서울의 도시적 발달, -향 분기 현상과 함께 사림도 분화하여 새로운 사회주도층으로 경화사족층이 대두. 이들 일각에서는 경제지학과 명물도수지학으로 학문 연구의 영역을 확장하였고, 이전의 북벌론을 반성하면서 북학론을 제기했으며, 급기야 정조대에는 일각에서 서학은 물론 서교(천주교)까지도 수용하려는 노력을 전개. 그러나 정조 사후 19세기 세도정치기에서 척족과 소수 경화거족(京華巨族)이 정권을 독점하며 경화사족층은 분열하였고, 정통주자학의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되고 문화자존의식이 쇠퇴. 청조 고증학이 크게 유행하고 청조 문물이 대거 수용되는 한편, 서학과 동학이 세를 확장하는 새로운 단계가 전개됨.

-조선후기 사회의 발전 과정과 그에 부응하는 학문과 사상의 단계적 전개 과정을 우선 전개하고 실학개념을 재정립하며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부여할 필요. 본고에서는 조선후기 사회와 사상, 문화 발전 과정을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하고, 그 속에서 숙종대에서 정조대까지, 그 두 번째 단계 학풍으로서 실학의 성격과 범위를 재정리.

 

사림의 집권과 경화사족의 대두

-사림은 선조대 이후 조선사회 주도세력으로 등장. 서경덕, 이황, 조식, 이이, 성혼 등을 계승한 사림학자들은 중앙에 진출하여 학문정치, 공론정치를 특징으로 하는 붕당정치를 구현하였으며, 주자학 이념에 따라 사회개혁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 양란에도 사림들의 적극적 역할로 위기를 수습할 수 있었으며, 이 시기 사림은 향촌에 머물던 재야 산림학자의 지도를 받으며 각처의 서원을 중심으로 결집. 인조반정을 계기로 사림은 정권을 확고히 장악하고 주자학의 이론적 토대 위에 사회적 안정을 추구. 효종 사후 예송은 종법질서, 나아가 예치의 실현 방법에 대한 이념적 차이로 야기된 논쟁.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는 가운데, 숙종대 이후 대체로 서인, 그 중에서도 주자주의적 지향성을 강하게 내세운 노론 계열이 정국의 주도권을 확보. 조선사회 전반에 걸쳐 주자학적 질서가 정착하면서 조선 나름의 독특한 문화가 본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으며, 이 시기 사림들의 문예활동도 활발히 전개됨. 한편, 이 시기 중원에서 청이 명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야기된 국제질서 변화는 조선 지식인들의 자아의식과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침. 병자호란 이후 고조된 조선 내부의 대명의리론, 북벌대의론은 조선중화의식을 성립시켜 조선의 문화자존의식을 강화시켰으며, 학문과 문화예술의 사상적 바탕이 됨.

-숙종 연간(1674~1720)은 조선이 양란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 조선사회는 농업 생산력 증대와 유통경제 발달로 역동적 변화를 보임. 특히, 임진왜란 이후 중국과 일본의 교역이 단절되자 조선은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획득하게 되었고, 이는 중흥의 밑거름이자 사회 변화의 계기가 됨. 박지원의 <허생전>에 등장하는 역관 출신 부호 변승업, 역관 출신 대부호 집안의 장희빈의 사례. 한편, 서울은 조선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선도하며 그 독특한 생활상이 성립. 서울 생활권이 점차 경기 지역 일원으로 확대되는 가운데, ‘귀경천향(貴京賤鄕)’ 풍조와 -향 사회적 분기현상이 현저히 드러남. 사림도 분화하여 서울과 교외(‘京郊’)의 경기 지역을 생활권으로 하는 경화사족층이 형성, 지방 향유층을 제치고 조선사회 새 주도세력으로 등장.

-탕평정국과 호락논쟁은 경화사족이 조선의 정계와 학계를 주도하는 계기가 됨. 갑술환국(1694) 이후 영남지방을 근거로 한 남인이 실세하고 노론과 소론이 주도하는 정국이 전개. 다시 노론 소론 남인 모두에서 서울·경기 지역 사림과 호서 영남 지역 사림이 분기하는 양상이 나타남. 서울과 지방의 사회적 분기 현상은 학계와 학풍의 분기로도 전개됨. 노론학계는 인물성(人物性)과 성범심(聖凡心)의 동이(同異) 문제를 놓고 서울·경기 지역의 낙론(洛論)과 호서 지역의 호론(湖論)으로 분기, 이른바 경학(京學)’호학(湖學)’이 대립. 남인학계 역시 서울·경기 지역의 남인, 경남(京南)’과 영남 지역의 남인, 영남(嶺南)’으로 분기하는 등 경·향 학계 분기는 일반적 현상. 이 가운데 경학경남이 그 세력을 확대하여 우월한 정치적 진출과 함께 학문적 우위를 점해가며 경화사족으로서 독특한 학문세계를 구축.

-이는 탕평정국이라는 정치적 조건과 조응하는 현상. 국왕이 왕권 강화를 추구하며 새로운 정치운영원리로 탕평론을 제기하였으며, 각 정파와 여러 정치세력의 조제보합(調劑保合)을 추구. 이 가운데 중앙 정계 핵심은 서울·경기 명문가 출신 각 정파 인물 위주로 재편되고, 이들 간 상호 견제 구조 위에 왕권과 정국의 안정을 도모.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경화사족은 관료학자로서 정치적 진출을 더욱 확대. 영조·정조대의 탕평정국 하에서 경화사족은 현저한 정치적 진출을 이룩하고, 사림에서 분화하여 조선사회의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대두.

 

경화사족의 새로운 문화와 학풍(‘실학)

-숙종대 이후 정착한 주자학적 생활 방식과 문화가 전통문화의 핵심적 요소가 됨(종법질서, 향약, 상하와 내외 명분 중시). 경화사족은 향유(鄕儒)와 구별되는 새로운 생활방식과 개성적 문화예술 활동 추구. 조선문화에 대한 자존의식에서 조선의 자연산천, 의관풍물을 재인식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예술활동을 정조대까지 활발하게 전개(진경시문풍, 진경산수화와 풍속화, 동국진체 등). 한편, 사장지학·의리지학 외에 경제지학과 명물도수지학을 중시하는 새로운 학문적 태도 등장. 영조대 이후 경화사족층이 서울 시정의 위항인(委巷人)까지 포함하여 확대되며 분화한 것도 새로운 학풍 등장의 조건. 경화사족 중 일부 문벌은 경화거족으로 발전한 한편, 일부는 유식(遊食)’ 계층이나 빈곤계층으로 몰락하는데, 여기서 위항인들이 경화사족에 편입됨.

-이들이 서울로부터 심화된 사회경제적 변동과 사()의 위상 변화를 절감하며 새롭게 주목한 것이 경제지학과 명물도수지학. 서울의 도시적 발달, 유통경제의 발달 같은 현실 변화에 부응하여 양반상인론같은 대안을 제시하기도 함. 박지원은 허생으로 상징되는 상업에 종사하는 새로운 지식인상을 제시. 아울러, 앞 시대 반계 유형원, 졸수재 조성기에 주목하기도 함. 그는 지식인에게 새로운 학문 연구를 촉구하고 기존의 명분론과 문화자존의식을 반성.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기호 남인과 소북 계열, 소론, 주로 노론이었던 연암일파 학자들은 사상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개방적 자세로 교류. 구체적으로는 소비적으로 흘러가던 경화사족의 생활을 반성하며, 생산의 담당자인 민의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지도하기 위한 실용적 학문 연구를 촉구.

-연암 박지원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이란 지향성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조선의 전통문화와 고전을 존중하면서도 창신을 위하여 외래의 새로운 문화를 적극 수용, 역동적 변화를 추구한 것. 이들을 중심으로 신학신문운동이 일어나자 그 파급 효과는 조선 문화 전반에 미치게 됨. 북벌론 대신 북학론을 제기하고, 청나라 학문과 문물은 물론, 때로는 서학과 서교의 수용까지도 불사함으로써 조선학계와 사상계는 큰 변동에 휩싸이게 됨.

 

북학, 서학의 수용과 사상적 갈등

-북학론과 서학론을 둘러싼 갈등은 정조 조정에서부터 야기됨. 경화사족 학자들은 정조의 탕평책과 청론사류(淸論士類) 등용 정책에 힘입어 진출하였으며, 서얼 출신의 학자들과 함께 측근에 포진하고 있었음. 따라서 이들에 대한 비판은 곧 정조의 기반 약화로 이어질 수도 있었음. 정조는 반정론(反正論)’, 사학(邪學)’의 반성을 전제로 시간을 두고 정학을 북돋운다는 부정학(扶正學)’으로 갈등을 봉합. 또한 규장각에서 주자학 관련 서적 편찬 출간 작업을 대대적으로 진행하고, 1800년 주자 서거 600주년을 맞이하여 주자학 전서 편찬을 추진.

-그러나 주자학은 절대적 지위를 잃고 청조 고증학과 비견되는 송학(宋學)’으로 상대화. ‘당괴(唐魁)’라 불린 박제가는 북학의를 제출하였으며, 정약용은 중국·서양의 과학기술을 연구하여 화성 신도시 설계의 실무를 담당. 정조 스스로도 주자학의 현실적 한계를 절감하며 불교에 의지하고, 북학과 서학을 적극 수용하여 전통문화와의 융합을 시도. 이런 양상은 정조시대 학문과 문학은 물론, 서예와 음악에 이르기까지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드러남. 정조는 수지이이의(隨地而異宜)’라는 외래 문물 수용 원칙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법고창신론과 함께 문화의 역동적 변화를 가능케 함. 한편, ()의 외연이 크게 확대된 상황에서 규장각 검서관(檢書官) 직 설치 등 중서층 출신 위항 지식인을 수용하고,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 갈등완화를 위한 상하동락원리가 강조됨. 박지원은 독서인이라면 모두 라고 주장.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서울 경화사족 사이에서 신분과 당색을 넘어선 개방적 교유가 성립(연암일파). 도시풍속도, 서민풍속도가 등장하는 것도 이 시대 문화예술의 새로운 면모.

-경화사족 학자들의 학문도 새로운 경향성을 띠었는데, 생산활동에 대한 관심과 민에 대한 지도능력의 회복을 추구. 흔히 이들을 경세치용학파=중농학파’, ‘이용후생학파=중상학파로 갈라놓기도 하나, 이들의 관심은 그 구도를 넘어 농업·공업·상업 전반에 걸치는 것이었고, 제반 산업의 유기적 연관관계 위에 생산력 극대화에 집중. 박지원의 과농소초(課農小抄),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정약용의 화성 신도시 건설 계획안, 경세유표(經世遺表)등이 경제지학 연구의 결실. 이러한 학문적 성과는 국가 정책으로 수렴. 화성 신도시 건설과 서울 사방 4유수부 체제(개성, 강화, 광주, 화성) 완성은 1일 생활권으로서 수도권 범위가 확정된 계기. 화성신도시 건설 과정에는 외래 신지식을 적극 채용하여 거중기, 수차, 벽돌 가마 등을 시험하였으며, 국영 시범농장과 국제무영시장 설치론 및 양반상인론 등을 활용.

-정조 사후 안동김씨 등 시파 세력은 척족과 일부 경화거족들만의 과두 독재체제로 정국을 운영. 정치 참여층의 축소, ‘상하동락분위기 쇠퇴, 상이한 정치 세력의 공존과 견제가 불가능해짐. 국왕이 제 역할을 못하면서 탕평정치는 붕괴하였으며, 조선후기 이래 사림정치도 와해. 정조대 개혁을 주도하였던 청론사류 중 일부는 외척세도가가 되어 비판 세력을 탄압. 이들은 청나라로부터 들어온 고증학과 문예에 경도하였고, 주자학은 물론 현실개혁을 지향하던 경제지학풍도 외면.

-반면, 집권층의 분열과 사회 분화로 여러 계층에서 다양한 학문 경향 등장. 연암 일파의 북학은 김정희, 박규수 등으로 이어져 본격화되었으며, 최한기는 북학과 서학을 아울러 수용. 한편, 향촌사회에서도 주자학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서학의 전파와 이에 맞선 동학이 확산. 이 시기 지식인들은 외척 세도정치의 극복과 함께 한학과 송학, 정학과 사학, 서학과 동학의 대립의 문제를 고민. 이 다양한 흐름은 주자학과 그 명분론, 문화자존의식 위에 수립되었던 전통적 사회질서와 문화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던 시대 상황에 따라 등장한 것으로, 전통문화와 사회체제의 청산과정이면서 실학으로 지칭되는 조선후기 사상과 문화 발전이 가져온 귀결.

 

새로운 실학론의 전망

-‘실학은 숙종 이후 정조시대까지 주로 18세기 경화사족이 제기한 새로운 학풍으로 정리할 수 있음. 전통주자학의 내재적 발전과정에서 등장하여 현실 변화에 부응하는 실용적 학풍을 특징으로 했던 실학은 경화사족의 정치적 진출과 함께 그 개혁 구상이 국가의 시책으로 수렴되기도 함. 향후 조선후기 사회경제의 구조적 변화와 연관지워 새로운 학풍을 이해하려는 심층적 보완연구가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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