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실학이란 무엇인가(2007, 푸른역사)
조선후기 도시경제의 성장과 지식세계의 확대(고동환)
-실학사상 연구의 주된 방법은 개인 저작 분석이나, 실학사상은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하나의 사상경향이므로 그러한 연구방법에는 한계가 있음.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지역성을 중심으로 실학사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이우성이 시도. 이우성은 경세치용학파인 성호학파는 근기 지방의 농촌환경에서 성장하여 사고가 복고적·고답적이었으며, 이용후생학파인 연암학파는 도시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 생활, 의식이 진보적·개방적이었다고 설명. 이헌창은 성리학적 사유체계는 농촌체험에 적합한 사유였던 반면, 실학적 사유는 도시경제생활 체험과 친화성을 지닌 사유체계로 규정. 본 연구는 선행연구의 문제의식을 계승하여 실학과 도시성과의 관련성을 추적.
-조선후기 도시경제의 성장에는 17세기 이후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그에 따른 농민층 분화, 잉여생산물의 처분장으로서 농촌장시의 확산현상이 영향을 미침. 그러나 내적 계기보다는 전쟁과 대외교육과 같은 외적 계기가 보다 중요한 영향을 미침. 첫째,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그 자체. 전쟁은 인구와 물자의 이동을 촉진하였고, 시장이 성장하는 계기를 만듦. 둘째, 임란시 참전한 명군을 통해 은화가 유입. 당시 명나라에서 유입된 은화는 900만 냥으로 추산되며, 조선 경제가 명 은 경제권에 편입되면서 시장이 급속히 재건될 수 있었음. 은화는 이후 일반적 교환수단이 되었으며, 화폐경제의 토대를 형성. 셋째, 17세기 후반 대외교역에서 획득할 수 있는 막대한 이윤. 일본은 중국과 직교역로가 단절된 상태였기 때문에 조선을 중개지로 하여 중국과 교역할 수밖에 없었음. 조선상인들은 중국의 백사(白絲)를 수입하여 일본상인에게 은화를 받고 수출하는 중개무역을 수행. 중개무역의 이익은 역관과 함께 동래상인, 서울상인, 개성상인이 차지하였으며, 투입자본에 비해 약 2.7배의 이익을 올림.
-사상, 역관들이 축적한 상업자본은 18세기 이후 공인자본으로 투자되거나, 고리대자금으로 운용됨. 또한 중개무역으로 집적된 부는 서울에 사치풍조를 널리 확산시킴. 한편, 중개무역과정에서 왜은과 함께 왜동도 상당량 유입되어 상평통보의 원료로 활용됨. 이는 1678년 상평통보 유통 성공의 배경이며, 동전주조는 1697년까지 20년간 지속됨. 또한 중개무역의 이익으로 국가재정에 여유를 가져와 대동법의 전국적 실시에도 영향을 미침.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던 시기는 중개무역의 이익이 국내에 집적되던 시기. 대동법 시행으로 공물대신 20여 만석에 달하는 쌀과 344동에 달하는 면포, 18,000여냥에 이르는 동전이 서울로 반입됨. 상당량의 상품과 화폐는 물론, 공가와 시가와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부도 서울에 집적.
-동전의 유통과 대동법은 서울의 도시화를 촉진. 동전 유통의 성공은 상품화폐 관계의 발전과 부의 축적을 가능케 함. 대동법은 요역의 고립화(雇立化)를 정착시켜 노동력 상품화를 진전시킴. 이는 도시에서 인간관계를 화폐를 매개로 한 지배 관계로 전환시켰으며, 도시에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듦. 그 결과 서울 인구는 18세기 중엽 30만 이상으로 증가. 인구 구성 또한 변화하여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상업인구가 대부분을 차지하여 서울은 상업도시로 전환. 경제적 이해관계가 모든 것을 지배함에 따라 유교적 강상명분이 점차 퇴조하고 경제활동과 인간본성을 긍정하는 새로운 도시문화가 형성됨. 그 주체는 서울의 중간계층(역관 등의 기술직 중인, 경아전, 시전상인 등)으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과 감정을 인정하고 부의 축적을 긍정함. 이들 여항인은 문화예술적 욕구의 증대와 유흥문화의 발달로 대변되는 새로운 도시문화를 형성시킴. 도시문화가 발흥하는 과정에서 도시민들의 학문 풍토도 변모. 연암의 허생과 여항인 장혼의 사례.
-조선후기 지식세계의 가장 큰 변화는 지식세계 자체의 확대현상. 첫째, 학문적 연원의 다양화가 이루어짐. 17세기 이후 육경고학에 기초한 범유교주의, 서학, 양명학, 청조 고증학 등의 유입. 17세기 후반 조선의 지식계는 학문적 소스의 다양화 속에서 격심한 갈등을 겪었는데, 윤휴, 박세당 등이 사문난적으로 몰린 것이 그 사례. 이 중 실학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주자성리학, 육경고학, 서학이었음. 유형원은 성리학의 의리 중심의 사회인식을 비판하고 실리를 궁극적 원리로 삼아 범유교 입장에서 사회적 위기 극복 방안을 제시. 한편, 서학의 전래도 실학에 큰 영향을 미침. 그러나 서학사상의 수용과정은 전통적 지식체계의 논리 하에서의 수용이었으며, 일부 학문에 편중될 수밖에 없었음.
-둘째, 지식의 유통속도의 증가와 유통체제의 확립. 17세기 후반 서학의 파급력을 정확히 파악하긴 어려우나, 서학은 소수의 연행사절이나 학자들만이 아니라 서울 사대부에게 널리 전파된 것으로 보임. 한편, 지식의 유통체제라고 할 수 있는 서책의 간행과 유통시스템도 성장. 서책을 판매하는 책사, 책을 대여하는 세책가, 책장수의 등장 등. 책의 유통과정에서 출판보다는 필사가 많이 이루어짐. 이러한 세책(貰冊), 매책(賣冊), 필사(筆寫) 등의 방식으로 지식은 일반 대중에게 널리 확산될 수 있었음.
셋째, 지식계층의 확대. 우선 초등교육기관인 서당의 증가를 꼽을 수 있음. 16세기 말 서원의 증가에 따라 그 부속교육기관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서당은 17세기 이후 서원과 독립된 사설 향촌교육기관으로 자리잡았으며, 사족이 연합하여 몇 개의 자연촌을 대상으로 서당을 설립하기도 함. 그러나 18세기 소규모 자산으로 운영이 가능한 서당계가 고안됨으로써 평민층도 서당을 운영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 이 시기 평민중심의 교재, 직업적 고용훈장의 등장 등 서당교육의 일대 변혁이 나타남. 서당의 확대와 초보적 교재의 대량 간행은 초급 지식인층이 양산되는 기반이었음. 이 시기 농촌에 정착하여 훈장, 의업, 소장대서업(訴狀代書業), 복술(卜術) 등에 종사하는 농민적 지식인이 등장. 이들은 19세기 행정문서, 법률문서의 간편화·정식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문자를 모르는 농민들의 솟장을 대신 작성해주는 역할을 하였으며, 농민항쟁기 지도자로 활약(전봉준). 농민적 지식인의 성장은 19세기 향촌사회문제의 해결방식을 관문회곡(官門會哭)-정소(呈訴)-민란으로 전화시킴. 이처럼 조선후기 확대된 지식세계에는 유학자와 더불어 하급지식인이 성장하였으며, 농민적 지향을 지닌 새로운 지식세계가 부가되었음. 동시에 도시문화의 발흥과 함께 확장된 지식세계가 19세기 이후 농촌과 향촌사회로 파급됨을 보여줌.
-반계, 성호, 다산은 모두 서울과 근기 지역 출신으로 도시경제의 세례 속에서 자신의 학문적 지평을 전개. 반계는 32세 부안의 우반동에 은거하기 전까지 서울과 경기 지역에 거주하며 그 학풍에 영향을 받음. 반계의 저작은 왕을 비롯한 조정의 신하, 향촌의 유생들에게까지 두루 읽히며 높은 평가를 받음. 성호는 광주에 살며 성호학파를 형성. 정약용도 근기와 서울에서 생활하며 학문을 형성. 그의 저작은 당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지녔으며 현직 관리들에게 직접 활용되기도 함. 이처럼 실학은 재야지식인의 소외된 사유체계가 아니었으며, 실학사상가들의 저작은 널리 보급되어 당대 지식세계의 주류적 위치에 있었음. 또한 실학자들의 저작 중 각종 실무적 지침서 등은 농민의 현실적 필요에 의해 널리 보급되고 수용되었으며, 새로 등장한 농민적 지식계층이 만날 수 있는 접점이었음. 실학사상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사회개혁론과 연결될 수도 있었으나, 당시 농민적 지식계층은 실학사상의 개혁론보다는 농촌의 생활체험에 기반한 동학사상에 경도되고 있었던 것이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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